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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세거성씨와 인물 - 한동열 歲運動)에 참여하고 광주(廣1·M)에서 상경(上京)한 유림({需林)틀과 광주 지역(廣州地域)에서도 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을 전개(展開)하기 로 일정 동을 상띄조정한 후에 향리로 돌아와 문중 어른들과 젊은 청장 년층(춤8 土年層)을 모아 3월 26일 저녁에 율리(票里) 뒷산인 모란봉(암꺼 峰)에서 시위를 알리는 봉화(峰火)를 올리기 시작하여 3 월 27일 분당리 장날에는 3000여명의 군중(群聚)을 이끌고 3 월 29일까지 열렬(熱烈)하고 끈기 있게 독립만세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도하였다. 급기야 일경(日 짧)에 체포되어 4 강. 고문과 악형에도 불구하고 “ 내가 조선민족(朝蘇民 族)으로서 조선(朝蘇)의 독립(獨立)을 주장(主張)함은 정의인도(正義A 道)에 기인(其因)한 정당한 의사발동(意思發動)이므로 죄(罪)가 아니다” 라고 강변(彈辯)짜며 상고(上告)를 거룹하였으나 내란(內亂) 빛 음모죄 (陰짧罪)를 적용하여 9 년 8개월의 중형을 선고 받았으며, 일제(日帝)가 국제간에 여론을 의식하고 조선민족(朝蘇民族)을 절대로 탄압하지 않았 다는 홍보를 위하여 급조된 소위 보안법위반(保安法違反)죄를 적용하여 서대문(西大門) 행무소에서 복역 중 영친왕(英親王) 국혼특사(國婚特敬) 로 13개월 만에 사면(敬免)되었다. 공(公)은 출옥(出歡) 후에도 농민운동을 전개하여 지주독립정신(딩王 獨立精神)을 고취하였고 1927년에는 한순회(韓順會), 이대헌(李大憲), 유인목(兪仁種), 박기환(朴基煥), 한용회(韓龍會), 한진회(韓辰會), 한백 호(韓百鎬) 둥과 협의하여 신간회(新幹會)광주지회(廣州支會)를 결성을 주도하고간사(幹事)를 맡아 적극적으로활동하였다. 1941년 팔월 회갑연(回甲훌)에 들어온 〈수석(壽席)〉이란 헌수축시(敵 壽祝詩)를소개하면, 吉甲重回歡降辰, 홈門fl 況貨壽其身, 彩舞續情令八月, f 옳歌鴻曲又 千華 길갑중회악강신, 오문축하수기신, 채무난정령팔월, 요가홍독우천화 좋은회갑돌 아온생신날에, 좋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