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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한필호(韓倒浩, 1814∼1864) 휘(證)는 필호(弼浩)이고 자(字)는 경뢰(景寶)이다. 어려서부터 학문 (學問)을 좋아하였는데 두뇌(頭腦)가 명석(明哲)하여 문장(文章)이 출중 (出聚)하고 특히 초서(草書) 글씨를 잘 썼다. 종사(宗事)에 밝아 문중인 (門中A)들에께 칭송(稱領)을 받았다. 청주한씨(淸州韓民) 문중 성원고 (姓源考)와 성씨사(姓民史)를 써서 청주한씨(淸州韓民)의 연원(淵源)을 밝혀놓아 문줍(門中)으로부터 섬오한 학문을 인정(認定)받는 계기가 되 었다. 환로(술路)에는 뭇이 없고 항상유유자적(?연뺑 딩適)하였따. 묘소는 율용-(棄洞) 산 91번지 내에 배위(配位) 문화유씨(文化柳民)와 건좌(乾坐)에 합조(合*)이다. 하 a 토 한백봉(韓百‘凰, 1881∼1950) 휘(譯)는 백봉(百鳳)이고 자(字)는 성의(聖懷)이다. 호(號)는 송헌(松 野)과 벽송(뿔松)을 사용하였다. 한영회(韓榮會)와 김해김씨(金海金民)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부터 진사(進士) 서상만(徐相뼈) 문 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여 한학(漢學) 전경서(全經書)에 통달(通達)하 였으며 성현(뿔賢)의 행적(行隨)을 본(本)받으며 오상(五띔) 인(仁), 의 (義), 예(禮), 끼(智), 신(信)을 항상 실천한 청빈하고 대쪽 같은 개화기의 선비이다. 공(公)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이며 확고한 민족자존(民族 멈存) 정신을 실천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을사(ζE.) 망국(亡國)을 당하여, 울분으로 지내던 중 1919년 2월말에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승하(昇週) 소식을 접하고 고종장례식(高宗舞禮 式)에 참석차 상경하였다가 손병희(孫秉熙), 한용운(韓龍雲), 권병덕(權 炳德), 오화영(吳華榮) 동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과 만나 3.1독립 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 취지에 적극 찬동하여 3.1독립만세운동(獨立萬 문화총서 @ 돌마 마을지(T) 앓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