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page

154 하。토 문화층서 @ 돌마 마을지(下) 신회맹(八功닮會盟)에 참여(參與)하였다. 문장이 출중하고 언제나 정도 (正道)와 정의(正義)로운 책무이행( 責務移行)으로 많은 조정문사(朝廷文 土)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성종(成宗) 13년에 부친(父親)을 여의었을 때 에는 종팔품(從八品) 선략사맹(宣略司錯)이란 벼슬에 있었는데 삼년시 묘 때문에 다환 형제들처럼 사임(蘇任)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올라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인 통훈대부(通혀|| 大夫) 삼등현령(三登縣令)을 지냈는데 얼마나 선정치민(善政治民)을 잘 하였는지, 삼등(三登) 현(縣) 두 곳에 선정 영세불망비(善政 永世不忘陣) 가 세워져 있다고 전해 온다. 연산군(藏山君)의 폭정이 극심해지면서 벼 슬을 버리고 선묘(先훌)가 계신 광주(廣1+1) 율리(票里)로 돌깅}와서 서당 을 짓고 후학찰 가 르치며 노후를 보냈는데 친손자(親孫子)들이 문무과 (文武科)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에 지은 문 중서당(門 中書堂)은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 때 서원철폐운동( 書院激廢 運動)에 헐어져 없어질 때까지 청주한씨(淸州韓E.0 문중에 계속 전하여 오면서 많은 문-인현사(文A賢士)를 배출하는 사학(私學)의 명가(名家)로 전통이이어져왔다. 증직(體職)으로 동급(同級) 내직(內職)인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 官)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를 제수(除授) 받았다. 묘소는 율동(票洞) 산 2-1번지 내에 율동공원 저수지(뺨水池) 번지 · 점 프대 북쪽에 정남향(正南向)인 지좌(子坐)에 숙인(淑A) 경주이씨(慶州 李民)와 쌍분합조(활境合%)이다. 한사개(韓士介, 1453∼1521) 휘(譯)는 사개(士介)이고 자(字)는 사렴(士嚴)이다. 음보(陰補)로 환로 (富路)에 나가 적순(週順)부위 충좌위(忠住衛) 전부(前部) 사맹(司鐘)으 로 역대(歷代) ;팔공신(八功닮) 회맹(會盟)에 사형제(四兄弟) 모두가 참여 (參與)하여 지띤(知面)을 넓힌 후에 성종(成宗) 13년에 부친(父親)을 여 혈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