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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7 세거서 q씨와 인물 한동 열 商)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천거(薦짧)하였다. 정승(政챈)들이 -공에게 청 백록(淸白錄)에 녹권(錄卷)을 권유할 때에도 적극 사양하였다. 이 해에 영가대사 남명천 선사 계송(永嘉大師 南明果 輝師 *領)을 언해하며 발 문(歐文)을 썼고,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짧多心經) 삼가해 (三家解) 언해를 썼다. 그리고 윤(閔) ·월 19일 졸(후)하니 향년(享年) 6o 세였다. 성종은 조회 를 사흘간 폐하고 극진한 예우로써 장사토록 하고 증(簡)대광보국(大흩 輔國) 숭록대부(떻視大夫) 의정부( 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시호를 문 정(文靖)이라 하였는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 (文)이라하고, 몸을삼가서 말이 적은것을정(靖)이라하였다.” 공의 입신양명은가문이조선초기의 명문현벌(名門顯關)이었으나,가 문의 배경보다는 항상 글 읽기를 좋아하고 모르는 것은 잘 물어서 이해 하여 학문의 집대성을 이룬 데 기인한 것이다. 특히 세종때 집현전(集賢 願)에 봉직할 때께 장서각(藏書聞)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박람강기(博폈 彈記)로쌓은학식이 큰바탕이 되었다 풍부한학식과단정한성품은주 위사람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특히 서거정( 徐居正), 강희맹(姜 希굶), 이승소(李承김), 성 임(成 任), 노사신(盧思|휩)퉁과 교분이 두터웠 다. 공이 병에 걸려 여러 차례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성종이 걱정하여 손 수 기도문(祝禮文)을 지어서 천지신명께 벌어주고 병이 낫자 불러들여 “경(柳)은 나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오. 나는 경의 얼굴을 불쌍히 여기 오. 내가 병이 들었을 때 나를 도와주었으므로 경이 병에 들었-을 때 나도 걱정이 되오, 걱정이 지나쳐 경의 이름을 듣기 싫을 정도였는데 오늘 뭇 밖에 경의 얼굴을보게 되어 대단히 기쁘오” 하였다. 공은 ‘항상백성들 을 생각하였고 흉년이 자주 들어 백성들이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데 내 어찌하루세끼끓먹을수있으리오.”하고조석으로두끼만식사하시는 것도아침에는서숙밥(票飯)과점심은황경(黃經)니무껍질을씹는것으 로 때웠고, 저녁에는 서숙죽(葉弼)으로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그래서인 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