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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司憲府藍察)을 지냈으나 세종 6년(1424) 정월에 하세(下世)한 정선공 주(族善公主)익 조카여서 그랬는지 증직(體職)으로 종이품(從二品) 가선 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暫參判)을 제수(除授)받았다. 묘는 율동 산 29-1번지에 증(體)정부인(貞夫A) 진주강씨(쯤州姜.[\;:)와 자좌(子坐)에 합조(合%)이고 팔대손 용익(龍靈)이 찬(操)한 묘갈(훌碼) 이있다 하。토 남념(南댐, 生沒未詳) 휘(譯)는 념(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생원 (生員)을 지냈다고 한다. 증직(體職)으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참의(參議)를 제수받았다. 묘는 율동 산 29 1번지에 숙부인(淑夫A) 순천이씨(順天李民)와 지좌 (子坐)에 합조(合~~)이다. 140 문화층서 @ 남찬희(南贊!팩, 1901∼1967) 휘(諸)는 찬젝(贊熙). 선대로부터 살아온 율동의 선대 묘소를 지키면서 살아오며, 청푸한씨(淸州韓.[\;:) 문중 어른들에게 한문을 수학하였다. 을 사조약(ζE條約)으로 국권(國權)을 빼앗긴 울분으로 지내다가, 독립운 동가인 한백봉(韓百鳳), 한순회(韓順會) 등이 주도한 3.1독립만세운동 때 에 이르러, 이십세도안된젊은나이에도불구하고, 적극가담하여 선두 그룹에 서서 꽉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견뎌내며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였으며, 물산장려운동(때塵樂願!運動) 과농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한숨은 애국지사이다. 묘소는 율동 산 63번지에 배위(配位) 니주임씨(羅州林f.\;J와 합조(合 %)묘이다. 돌마 마을지(T) 렇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