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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세거성씨와 인물 ·한동열 시(런失)와 조총(鳥統) 및 창검(橋劍)을 익히게 하는 한편 삼수(三水) · 갑산(甲山)과 육진(六鎭)에는 남정(男丁)들이 드물어 건장한 여인들을 가려 활과 총 쏘눈 법을 가르치자 상(上)께서 바람직하게 여기고 어사(細 便)를 보내 기예(技藝)를 시험하였다. 신기비결(神器秘앓)을 모아 인판 (印版)하여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 주어 익히도록 하였다. lC-03년(宣 祖35) 호조판서(戶費判書)로 들어와 미납세(未納脫)를 탕감해 주어 도민 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이듬해 선무공신(宣武功닮) 이퉁(二等)으로 책록 (策錄)되고 서흥군(西興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이판(更判)파 호판(戶 判) 동을 거쳐 lC-05년(宣祖38) 평안감사로 특명을 받아 평소부터 부진하 던 이 지역 민심뀔바로잡았으며,숭정대부( 뿔政大夫)의 품계(品階)로올 라 사도체찰사(때道體察使) · 우찬성(右贊成) · 병조판서(兵떻判書) 또 다시 이조판서(更暫判書) · 의금부사(義禁府使)등을지냈다. 16o8년(宣祖41) 선조(宣祖)가 승하(昇週)하시고 얼마 안 되어 개성유 수(開城留守)로 나갔다. 1616년(光海8) 10월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이때 정조(鄭造) 퉁이 대비(大뼈)를 폐(廢)할 것을 주장하고 일어나 화 (福)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자 무려 11차례나 소(統)를 올려 외직을 청 하였다, 이듬해 ; 겨울 폐모론(廢母論)이 더욱 심각해지자 다시 사직을 청 하니 윤유겸(尹|佳議) 퉁이 폐모론을 앞에 두고 서둘러 사직을 하려 함은 대신의 직분이 아니므로정형(正升”)으로다스려야한다고주장하였다. 1618년(光海10) 좌의정에 올랐다. 1월 16일 기준(奇俊)이 허균( 許휩)의 역변(遊變)을 황급히 고( 告)하여 오므로 공이 먼저 그를 국문(輔問)하기 를 청하자 대간렐이 말하기를 대론(大論)을 가볍게 여기고 국문이나 청 하는 것은 전도(顧倒)가 무상하다는 탄핵을 받고 공은 사직을 청하였다. 흉도(비徒)들은 모후(母尼)를 폐하는 것을 대론(大論)으로 삼고 1월 4일 부터 들고 일어났으므로 공은사직을 청한 채 두문불출하고 있었는데 박 경신(朴慶新)이 찾아와서, “ 대비(大如)의 위태로움뿐만 아니라 공의 조 카 유천(柳川 韓浚讓)이 7신(닮)으로서 참화가 임박하게 되었으니 요원 좋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