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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동은 심L국시대인 한성백제 당시에 왕실전용의 정자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를 찾달 수 있다. 한성백제는 낙생면(樂生面)에 행꽁(行宮)을 지었다고 전해 오는데 그때에 왕실전용의 정자를 동시에 지었다는 것이 이지역의전설이다 왕실전용의 정자라서 대단히 큰 규모였다고 전해 온다. 고려시대(高麗 時代)의 기록은 광주목장(廣州救場)이라는 명칭 이외에는 없다. 조선시 대에는 태종(太宗)이 정자리에 있었다던 광주동정(廣州東亨)에 나와 머 무신 기록이 두 번이고 세종(世宗)도 광주동정에 머문 기록이 있는 것으 로미루어신빙성을더하고있다 . 특히이지역에전해오는전설중에태 종(太宗)이 통정(東亨)에 머무는데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아버지를찾아봐러 동정으로나오자왕재(王才)를 시험하여 보았는데 자 신보다 더 과격핸 세자의 사고를 확인하고는 세자를 경질하여야겠다는 결심을굳히게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성남시사(城南市史)』 에 이경인(李敬仁)이 태인정(泰仁亨)이라는 정 자를 지어서 정2‘{동이 되었다는 설은 잘못 기술된 것이다. 그보다 수백 년 전인 태종실확(太宗實錄)을 상고하여 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 勝魔)』을 살펴보면 즉시 답이 나온다. 탄천변에 있는 478번지에서 480번 지 일대가 광주황정(廣州東亨)이 있었던 정자 터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태인챙지(泰仁亨地)는 정자동 산 33번지라는 사실에서도 확 연히 다른곳이라는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 이상 정자동의 지명 유래는 즉시 개정되어야 정자동주민들은 물론 일백만 성남시민(城南市民)들이 한성백제의 문화 의 보고라는사실에 감동할 것이다. III 5-1. 마을명칭 돌 마 면 의 유래 -한동억 • 양지미을 ; 정자동 148번지에서부터의 양지쪽에 있던 마을이다. 찢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