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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거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밀휴하여 돌아오자 단원들은 은밀한 모임 끝에 3월 19일 합천시일에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미리 선언서와 태극기 수백장을 만드는 한편 심재현 손득룡 이용선 김영기 추용만 이상우 등 12명으로 결사대를 편성하다. 3월 19일 미시에 시장에 모인 500여명의 군중과 더불어 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일대 시위 운동을 전개하니 모든 군민이 합세하다. 이에 놀란 일경무장대가 총검으로 위하하고 심재기 등 16명을 구금하고 강제 해산케 하였으나 3월 20일 유시 대양에서 재집결한 결사대원이 보무당당 읍내 광장에 이르러 전일 약정한 각동에서 참집한 군중과 합세하여 구금된 애국지사 석방요구와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읍내를 일주하니 읍중인사들이 호응하는 자 수 백에 이르다. 드디어 경찰서를 포위하니 이에 당황한 서장이 선 해산 후 석방을 제의해 왔으나 우리 측은 선 석방 후 해산을 요구하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니 극도로 격분한 대중은 결사대원을 선두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맨주먹으로 노도와 같이 돌진하다. 일경의 일제 발포에 추용만 김영기 김호준 강시만이 순절하고 이용선 손득룡 등 부상 동지와 함께 구금되다. 손톱 발톱을 뽑히는 모진 고문 끝에 심재현 손득룡 이용선 이용수 강상무 동지와 같이 주모자로서 2개여년의 옥고를 치르다. 이후 구국단심은 더욱 타올라 원근 동지들과 뜻을 모아 다시 항쟁을 계속하니 크고 작은 신고는 헤아릴 수 없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아 몸과 마음을 건국사업에 바치고 여생을 향리 후진 교도에 힘쓰다가 1961년 10월 1일에는 70세로 세상을 마치다.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