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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공은 이러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믿으셨고 부모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시었다. 병인박해 때에는 집안에 미치는 화란을 피해 9세 소년이었던 공은 부친을 따라 일시 강원도 간성에 은둔하였다가 평란이후 구산으로 회향하셨다. 공은 천품이 강직해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였으며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공은 늘상 시국을 개탄해 마지않았다. 1919년에 드디어 우리 민족의 도도한 역량이 일시에 분출되어 침략자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니, 기미만세운동이 그것이다. 이때 공은 62세로 삼천리 전토로 울려퍼지던 독립만세 소리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광주의 시위운동을 주도하시었다. 3월 26일 구장일을 맏고 계시던 공은 주민들을 이끌고 마을뒤의 구산으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며 목청껏 독립만세를 불렀다. 익일에도 공은 수백명의 시위대를 선도하여 천현리에 있던 동부면사무소로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 함성에 놀란 면장과 서기들은 항급히 도망하기에 이르렀다. 이날의 시위에는 공의 장남 정해, 차남 정숙, 삼남 정수, 오남 정필을 비롯하며 당질 정운, 질서 권명규등 여러 혈족이 동참하였다. 다급해진 일제헌병은 맨손의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하면서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공은 이처럼 다급한 상황에서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독립만세를 절규하디가 결국 일제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후 공은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고문을 당하셨다. 몸을 거꾸러 매단채 물을 먹이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를 끼우고 비트는 등 야만적인 방법으로 공에게 갖은 신체적 고통을 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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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은 광주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9년 4월 29일 경성법원에서 1년6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룬끝에 만기 출소하시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마로 인해 3년간 병석에서 고생하시다가 1923년 음력 4월 25일 망국의 통한을 품은채 66세를 일기로 타계하시었다. 공이 가신지 71년뒤인 1994년에 공은 독립운동에 끼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