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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일은 1919년 3월 1일 경기도 양평읍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와 같이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짧은 시간에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 각 지역별로 책임자를 두었다. 이때 김영일은 정배리(鼎排里) 지역을 담당하였다. 당시 김영일은 서울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엽우회(獵友會)의 회원인 이정봉(李正鳳)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은밀히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정배리의 주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여 계획에 차질없도록 거사준비를 진행시켜나갔다. 거사 당일 3월 1일 새벽, 그는 숙부 김민현(金敏鉉)·외숙 박중빈(朴中彬)과 함께 태극기를 가지고 양평읍내로 들어갔다. 양평읍내에 도착한 이들은 많은 군중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가 정오쯤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시위군중의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일경에 의해 시위대는 저지 당하였고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양주헌병분견소에 피체되어 1919년 5월 5일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