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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하늘님 되는 세상을 향하여 늙으신 부모님을 남겨두고 집을 떠나온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청산에서 기포령(起包令)이 내리던 날 집 떠나기를 망설이던 나에게 단호히 말씀하시던 아버님의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나라가 무너지고서야 어찌 부모형제가 있겠느냐. 어서 채비하여 집을 나서라. 네 아우도 데려가라. 가서, 저 무도한 왜놈들과 서양 오랑캐들, 서울의 권귀(權貴)들을 물리쳐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다 두고 장차 만백성이 저마다 하늘님이 되는 세상을 열거라." 손병희 통령 지휘 아래 논산으로 내려온 우리는 전봉준 장군 부대와 연합하여 공주로 진격했다. 노성을 지날 때 진눈깨비와 함께 목천의 동학농민군 일곱 명이 처참한 몰골로 연합부대를 찾아왔다. 서울로 가는 길목을 선점하고자 가파른 산등성이에 군량미와 무기를 숨겨두었던 목천 세성산 근거지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고 한다. 이인과 웅치 효포전투를 시작으로 우리들은 우금치 능선을 오르내리며 관군.일본군과 밤낮없이 혈전을 벌였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쏟아지는 왜놈들의 포탄과 총탄에 머리통이 꿰뚫리고 가슴팍이 씻기고 팔뚝이 떨어져나간 동학농민군의 주검들이 골짜기마다 겹겹이 쌓여갔다. 씻겨진 깃발 나부끼는 겨울나무가지 사이로 게걸스럽게 날아드는 숱한 까마귀 까마귀 떼, 까마귀 떼를 뒤로 한 채 우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를 거듭했다. 갑오년(1894) 11월 무명 동학농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