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page


25page

리에 천묘하였다. 문헌공의 휘는 자운이고 청백리로 명성이 높으신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휘 해와 정당문학도첨의찬성사문정공 휘 택의 후손이며 좌리 공신 일등으로 성종조에 영의정에 오르시고 무송부원군으로 책봉되셨다. 송재공과 덕사공은 문헌공 사우가 퇴락하여 일제학정에도 불구하고 문중의 총의를 얻어 고난 끝에 1936년 병자 윤 3월에 중수하였다. 송재공은 문헌공 부조묘 중수기를 찬하였고 송재공 덕사공 그 외 지방 유림들이 시를 지어 문헌공의 공덕을 송축하였다. 그런데 한 종인의 잘못으로 문헌공 위토답을 저당하여 타의 소유로 넘어가게 된 것을 송재공이 발견하여 덕사공과 협력하여 즉시 법적 조치함으로써 보존케 하였다. 당시 양공의 공로가 없었으면 오늘날 문헌공의 부조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문헌공의 사우를 이곳 관당리 산 37의 1번지로 천사 봉안함에 있어 어찌 양공의 공적을 잊을 수 있으랴. 양공이 오고간 자취 우뚝선 공적비에 공들의 영혼이 서려있네. 세월은 흘러도 그 자취 남으리라. 종족의 성의를 모아 이 비를 세우나니 편석에 새겨진 그 이름 천추에 빛나리라. 장선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