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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전국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게 항전을 계속하여 많은 희생을 내기도 하였다. 정선생은 이러한 대열의 선두에서 항시 혁혁한 공적을 세웠으나 불행히도 서기 1907년 8월 11일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어 복역 중 경술국치가 이루어지던 해에 겨우 석방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굳은 결심은 결코 변할리 만무였다. 유일한 목표는 빼았긴 나라를 도로 찾는 길 밖에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한복으로 변성명까지 해가며 표면으로는 경천교란 종교적 간판을 내세우고 안으로는 독립쟁취를 위한 지하운동을 더욱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간선 자신의 소유토지를 팔아서 그 금액을 상해에 있는 한국임시정부에 보냈으며, 가계의 인궁함을 감수하였다. 그리고 목숨을 내걸고 밤낮의 구별 없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많은 군자금을 모아서 서울 거주 연락원 신덕영을 시켜 계속적으로 상해의 한국 임시정부에 헌납하였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서기 1921년 12월 30일 일제에게 잡ㅈ히어 갖은 고문 끝에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이란 중형을 선고 받았던 것이다. 여러 형무소로 전전하며 복역 중 동지 11명이 다시 검거 되니 일제는 그들에 관한 불리한 증언을 강요하는지라 선생은 혀를 깨물고 벙어리 행세로써 일관하였다. 너무도 심한 학대와 악형으로 선생은 더 이상 건강을 지탱할 수 없게 되자 형집행 7년 6개월만에 가출옥 시키고 말았다. 그 뒤 선생은 각종 질환으로 일생 동안 신음하였으니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랴. 천도가 무심치 않아 서기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였으니 이는 모두 선생과 같은 열렬한 구국운동에서 연유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어 서기 1977년 12월 13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혈통을 이어 받은 장남 정순모씨와 차남 정홍모씨는 다 같이 원근에서 이르는 효자일 뿐만 아니라 성품이 돈후하고 예의 바르며 한편으론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남달리 강하여 큰 칭송을 받고 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마음가짐을 배워야 할 것은 물론 영원히 신의 가호가 있어 그의 가문에 무궁한 번영이 더하기를 소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부귀영화도 아랑곳 없고 생명 또한 홍모처럼 가볍게 여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