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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창현 선생의 호는 선이요 문화류씨 차달공의 33세손이신 지항씨의 다섯째 아들로 송산면 부곡리 비안마을에서 1918년에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관후하고 행동거지가 돈독하였다. 송산초등학교(5회 졸업)를 거쳐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즉시 일본으로 유학, 명치대학에서 수학중 나라잃은 망국의 한을 깨닫고 구국의봉대를 조직,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살이를 하고 추방되어 귀국하게 된다. 류창현 선생은 광복후 짓밟혔던 민족문화를 되살리기 위한 국민계몽사업으로 중앙통신사를 경영하였고 조선청년회장의 대임을 맡고 임시정부요인들과 수시로 만나 시국을 의논하였다. 또 한국민족사회당을 창당, 당수로 추대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후보로 당진군에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당시 류창현 선생의 선거연설을 들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말 잘한다 류창현, 경륜높다 류창현”이라 했다. 류창현 선생은 2대 국회의원 선거직전에 극우파들의 간계로 공산당으로 매도당해 경찰서에 구금되면서 입후보등록서류를 강탈당하고 등록도 못한 채 영어의 몸으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6.25전쟁으로 정부가 잠시 대전으로 옮겼을 때 이범석 장군의 보증으로 풀려나 고향인 송산면 비안마을로 돌아왔다. 당시 국토의 대부분이 공산군에게 점령당했었는데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는 류창현 선생을 공산당원들이 체포해갔다. 인민군이 북으로 쫓겨갈 때 8월 16일(음력) 송산면 밤절 뒷산에서 애국지사 50여명과 함께 손을 철사로 결박하고 총을 난사하니 한많은 세상을 마감, 33세에 요절했다. - 출처 : 당진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