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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5월31일 목요일 6 (제137호) 기 획 춘천박씨는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의 20세손인 경명왕 (景明王)의 일곱 번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공(彦 智公)의11세손휘는항(恒)의후예이다. 휘 항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정해년(丁亥年)에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해 벼슬이 삼한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韓 三重大匡門下贊成事)가 되었고 나라를 위해 세운 큰 공으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의공(文懿 公)으로 후손들은 대대로 춘천을 세거지로 본관을 춘천으로 하여살아왔다. 춘성부원군은 아들을 둘 두었는데 장남은 원굉(元宏)으로 벼슬은 평장사(平章事)며, 둘째는 원비(元庇)로 벼슬은 판사 (判事)이다. 원굉(元宏)의 아들은 안구(安具)로 벼슬이 집현 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이고, 원비(元庇)의 아들은 광선(光 先) 광우(光祐) 광정(光廷) 광연(光衍)이다. 딸은 안동(安東) 권각(權慤)에게 시집갔다. 공(公)의 충효(忠孝)는 당대에 특 별히뛰어났고,재덕(才德)은백대(百代)에으뜸이었다. 삼산리에 거주하는 춘천박씨는 두 문중으로 구분된다.즉 춘 성부원군의 두 아들 원굉(元宏)의 후손과 둘째 원비(元庇)의 후손으로 처음 입향은 장남 원굉(元宏)의 13대손 삼산공 휘 경 문으로 출생연도는 미상으로 1602년에(선조 35년)에 용담(龍 潭) 권지(權誌), 송간 이정회, 만취 권산립, 어천 김순룡 등과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여 봉람서원을 창건하는데 주도적 역할 을하였던것으로생몰을추측할수있다. 입향 경로를 보면 춘성부원군을 비롯 5세 휘 의공(義工)의 묘소가 춘천 수지동(水芝洞)에 소재하고 그의 아들 영기(英 奇)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충간(忠幹)이 충주목사를 역 임함으로서 묘소가 청주에 있어 임지(任地)인 충청지역, 차남 신간(信幹, 경상도절제사), 삼남 성간(成幹, 전의부사정, 경상 도 안렴사), 사남 인간(仁幹)의 묘소는 모두 춘천에 있어 대대 로 춘천에 세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삼남 성간의 손자 휘 봉우(逢雨, 만호공)는 무과에 급제하여 축산만호를 역임하고 춘천에서 경북 예천 용궁현 대죽리로 이거하였다가 진보면 북 평리에입향하여영양군입향조가된다. 삼산리의 또 다른 문중은 춘성부원군의 둘째 원비(문과 判 事)의 17世 휘 원길(元吉, 號 蓮谷)이다. 연곡공(蓮谷公)은 17 74년 경북 영해부에서 태어나 아들 도환(道煥, 호 碧岩)과 함 께 세거지를 청송군 진보면 북면(현 입암면 삼산리)로 세거지 를옮겼다. 이 들의 입향 경로를 보면 원비의 손자 휘 농(農)은 통정대 부 선교랑 칠원현감으로 스스로 춘천에서 경북 용궁현 대죽리 로 이거하였다고 족보에 전해진다.그러나 현감공의 외증손 퇴 계 이황이 어머니 춘천박씨 묘갈명에 이르기를 ‘고려 말에 원 비(元庇)라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은 판사(判事)였다. 이 분이 광정(光廷)을 낳았고, 경상도 용궁현 대죽리로 이사하였으니 곧 어머니의 고조부이다. 증조의 이름은 농칠(農漆)인데 현감 을 지냈다. 조부는 효전(孝佃)이고, 아버지는 치(緇)인데, 숨 은덕이있었으나벼슬하지아니하였다.’라고기록하고있다. 퇴계의 외조부 휘 치(緇)는 아들을 셋 딸 둘을 두었는데 장 남 문로(文老)는 상주로 이거 상주파, 차남 치( 齷)는 경북 영 덕 군 평 해 로 이 주 평 해 파 , 삼 남 려 는 영 해 괴시리(槐市里)로 이거 영해파로 세계를 이루고, 장녀는 진성인 이식(李埴)에게 시집가 퇴계 이황을 낳았고, 차녀는 동래인 정윤언(鄭允彦)과 결혼했다.삼산 입향조 연곡공은 영해로 이주한 영해파 휘 려의 12세가 된다. 삼산리에는 도은(島隱) 박언필(朴彦弼)을 추모하고자 지은 도은정(島隱亭)과 후손들이 종중일을 의 논하고 선조의 재향 을받드는영모재가있다. △도은정(島隱亭) 도은정(島隱亭)은 조선 중기 중종대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낸 도은(島隱) 박언필(朴 彦弼)을추모하고자지은정자이다. 박언필은 조선시대 명종~선조 연간에 벼슬을 그만두고 산해 리에 은거하면서 마을 북쪽 반변천에 우뚝 솟은 초선도(招仙 島)를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러한 조상의 덕을 기리고자 1907년(융희1)에 박언필의 후손인 박동면(朴東冕), 박동섭 (朴東燮), 박동희(朴東熺) 등이 선생의 추모하기 위한 건물로 지은것이도은정이다. 도은정은 정면3칸,측면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사방 에 담장을 두르고, 정자의 좌측에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 하게 하였다. 반변천이 굽이쳐 흐르는 절벽 위에 북동쪽을 바 라보고 세워져 있다. 정자는 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 씩을 둔 이른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구조이다.일반적인 정자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전면에는 퇴칸을 두고,계자각을 세 운난간을설치하였다. 도은정에는 주옥같은 많은 시문이 전해진다. 박언필은 벼슬 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북서쪽으로 손에 잡힐 듯이 반변천 속 에 솟아오른 초선도(招仙島)를 보며 때때로 그 경치를 보며 떠 오르는 시상을견딜 수 없어 한 수 짓기도 하고,시간이 날 때마 다직접그곳에올라울울한심사를토로하였다. △박봉우(朴逢雨,생몰년미상) 자·호는 미상. 관(官)은 만호(萬戶), 예천 군 용궁면에서 영 양군 입암면 산해리에 이주하였다.현재 그의 후손들이 입암면 삼산리에살고있다. △박경문(朴慶門,생몰년미상) 자는 미상, 호는 삼산(三山). 문학과 의를 행함으로써 향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봉람서원(鳳覽書院) 건립 시 그 가 소유했던 서숙(書塾)을 출연하여 도왔다. 춘천박씨 삼산마 을입향조이다. △박봉(朴熢,생몰년미상) 자 회숙(晦叔), 호는 표암(票巖). 그는 생원시(生員試)하고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지냈으며, 만년에 수비면으로 옮겨 살 았다. △박상범(朴尙範,1588~1913) 만호공(휘 봉우)의 후예로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 隱)이다 박진수(朴鎭壽)의 아들로서 입암면 삼산리에서 태어 났다. 1890년(고종 27년) 문과에 급제하여 1819년(고종 28)에 승문원정문자(承文院 正文字)에 제수되었다. 1901년(고종 38 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에 올랐고 또 봉상정(奉常正)을 지냈으며 1902년에는 다시 지제고(知制誥)를겸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우주감조관(虞主監造冠)에 임명되고, 1905년 다시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직을 받았으 며, 9월에 연주감조관(練主監造冠)을 제수 받았다. 그 해 10월 에 일본이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그는 죽음을 무 릅쓰고 통곡하며 상소장을 올리기도 했다.계속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렇게 상소 를 올리는 중 장남의 참사 소식을 받고 귀가했다.귀가 후 두문 불출하고자연속에묻혀지냈다. 그는 스스로 가은(稼隱)이라고 호를 짓고 어렵게 생계를 꾸 려가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변함없 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통곡하고 침식을 전폐한 채 두문불출하다 1911년 산에 들어가 정사(精舍)를 지어 조용 하고 편안하게 지내다가 망국의 한을 지닌 채 59세로 생을 마 칠때까지은둔생활을하였다. 븮옥서일록(玉署日錄)븯은 박상범(朴尙範;1855~1913)이 신축 년(1901년) 12월 7일 홍문관시독(弘文館侍讀)에 제수되어 업 무를 보는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문집인 븮가은선생문집 (稼隱先生文集)븯권 3에수록되어있다.(1936년 발행) 홍문관시독에 제수된 날로부터 이듬해 12월 그믐까지 약 1 년간 홍문관에서 있었던 일이나 자신의 업무에 대해서 자세하 게 언급하고 있다. 옥서(玉署)는 홍문관의 별칭이며, 옥당(玉 堂)혹은영각(瀛閣)이라고도부른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 때문에 자주 왕에게 조정 의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간언하는 입장이었는데 사헌부와 사 간원의 합계(合啓)에도 왕이 그 간언(諫言)을 듣지 않으면 마 지막으로 홍문관을 합하여 3사가 합계로 간언하였다. 연산군 때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 1506년(중종 1)에 복구 하였고, 1894년(고종 31)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 (經筵院)이라 개칭하였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쳐 서 칙임관(勅任官)의 대학사(大學士)븡학사븡경연관(經筵官), 주임관(奏任官)의 부학사(副學士),경연관븡판임관(判任官)의 시독(侍讀)을두었다. 박상범의 초명은 제원(悌源),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 (稼隱),본관은춘천(春川)이다. 아버지는 진수(鎭壽), 어머니는 함양오씨 한근의 딸과 고령 신씨 증도의 딸이다. 189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국정이 문 란해지자 고종임금에게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흥학교(興學 校 : 학교를 진흥시킬 것)븡수군정(修軍政 : 군정을 개수할 것)븡 절재용(節財用 : 재정을 절약할 것)븡택민목(擇民牧 : 목민관을 잘 뽑을 것)븡균부세(均賦稅 : 세금을 균등하게 부과할 것)의 5 개조목을진상할만큼나라를생각하는마음이남달랐다. △박언필(朴彦弼,생몰년미상) 자몽뢰(夢賚),호는 도은(島隱).중종대에 가선첨추(嘉善僉 樞)를지냈다. 그는 후학 지도를 그의 임무로 자연의 풍미 속에 묻혀 지냈 다. 진보(眞寶) 현북(縣北)(지금 입암면 산해리)에 있는 초선 도 (招 仙 島 )의 기 경 (奇 景 )을 음 미 하 여 그 의 호 를 정 했 다 고 한 다. 이 곳에 그의 후손들이 추모하여 지은 정자를 세우고 사림 (士林)들이 수계(修 싸)하였다. 1972년 그의 시여계(詩與싸)2 첩이정서하여간행되었다. △박정기(朴貞基,생몰년미상) 만호공의 후손으로 자는 덕구(德久).그는 인정 많고 후덕하 여 평소에 궁핍한 자를 구휼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었으 며,수재를 당해 유실된 봉강(鳳江)하류역의 보(洑)를 사재를 털어 복원하였다.현종조 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 용양위 부호군(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龍웹衛副護軍)에 추증되었 다.주손(재기)입암에거주한다. △박치강(朴致康,생몰년미상) 호는 괴은.영해 괴시리에서 출생하여 1820년(순조 20)경 후 손이 경산시, 영양으로 이주, 입암 삼산, 청기, 부진, 수비면 오 기리 및 군내에 살고 있다. 1456년(세조1) 성균진사시에 합격. 김종직과 교유한 사실이 점필재 문집과 예림서원(밀양 소재) 중간본에 기록되어 있으며 세조는 성균생원으로 있는 공(公) 게 경서를 강(講)하게 했다는 기록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전해 져점필재문집과조선왕조실록의내용을옮겨본다. [관어대부(觀魚臺賦)-김종직/점필재집문집1권] ▲병술년 7월에 이시애(李施愛)가 모반하였으므로, 내가 절 도사(節度使)의 명으로 군사를 모집하기 위하여 영해부(寧海 府)에 갔다가, 군사를 모집하기 전에 교수(敎授) 임유성(林惟 性), 진사(進士) 박치강(朴致康)과 함께 가정(稼亭.李穀)의 구 가(舊家)를방문하고인하여관어대(觀魚臺)에서놀았다.그런 데 이날 바람이 조용하고 물결이 잔잔하였으므로,절벽아래서 뭇 고기들이 헤엄쳐 노니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마침내 목은(牧 隱)의소부(小賦)에화답하여두사람에게끼쳐주는바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 8월 15일 병신 2번째 기사 ‘생원 박치강 등에게 경서를 강하게 하다.’ 생원(生員) 박치강(朴致 康)등 5인에게경서(經書)를강(講)하게 하였다.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 9월 1일 신해 1번째 기사 ‘양심 당에서 종친 등의 문안을 인견하고 성균 유생에게 경서를 강하 게 하다.’종친(宗親)등이 문안(問安)하니,양심당(養心堂)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최항(崔恒)·공 조 참판(工曹參判) 강희맹(姜希孟)·인순부 윤(仁順府尹) 한 계희(韓繼禧)와 우승지(右承旨) 이파(李坡)를 불러서 술자리 를 베풀고 성균 생원(成均生員) 박치강(朴致康) 등 5인에게 경서(經書)를강(講)하게하였다. △박함(朴涵,생몰년미상) 자는 미상, 호는 국와(菊窩). 박언필(朴彦弼)(본 인물편 참 조)의 조카이다.선조조 때 판관을 지냈으며,학문과 문장이 뛰 어났다. /자료제공박영탁, 연곡공(蓮谷公)后 뱚집성촌 탐방 경북영양군입암면삼산리(춘천박 씨) 경북 영양군입암면삼산리전경-마을앞 냇물이 마치안동의하회마을이나예천의회룡포마을을연상하게한다. 경북영양군입암면삼산리전경-마을앞냇물이마치안동의하회마을이나예천의회룡포마을을연상하게한 다. 경상북도 영양은 대대로 충의열사와 문인이 많이 배출된 유서 깊은 선비의고장으로 삼산리는 본래청송군 진 보현 북면의지역인데 2백여년 전에 춘천박씨 삼삼공(三山公)휘 경문(慶門)선생께서 처음으로 이 마을을 개척하 였다. 당시에는물건너섬마을이라하여섬촌으로불렀다.뒤에삼면이산으로둘러싸였다고하여서삼산이라고쳐 불렀 으며,1914년행정구역을고칠때삼산동이라고하여입암면에들게했고,1988년행정단위동을리로개칭했다 . 뱚▶입향약사 영모재-종중사를의논하고선조의재향을모시는재사(齋舍)로 사용된다. 뱚▶선조의유적 뱚▶경북영양군의춘천박씨인물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모두가함 께만들어가는500만 박씨종중의정론지븣성손여러분 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 선조님현창사업을위한소중한 기금입니다. 뱚뱚 선조님과관련된자료를제보하여선조님현창사업에동참하여주시기바랍니다.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fax053-581-0067 뱚뱚e-mail:parkss1012@hanmail.net ※ 성손 여 러분이 납부하 여 주 신 소 중 한 구독 료 는 신문발 행 에 큰도움이됩니다.후원에감사드립니다. 구독료및후원금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