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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규(1891~1963) 우리말 살리기에 이바지한 인물. 자 영화 호 계산 본관 자주 원래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석교에서 출생하였는데 부친 금사공이 평사리 운전에 터를 잡고 이사하여 이 고장의 사람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했고 널리 덕을 베풀기에 힘썼으니 개간사업을 일으켜서 흉년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살린 바 있다. 1930년대에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우리마을 살려내자는 움직임이 일어나 표준어 제정이 실현되었으며 이어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 추진되고 있었다. 그는 이 사업에 동참하여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당국은 1942년 동 사업과 관련해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란것 을 꾸며냈다. 그는 이 시건으로 연루되어 함경남도 흥원경찰서로 잡혀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저들에게 의관을 짓밟히고 머리가 깎이는 수모를 당해서 이후 평생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