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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산은 본명은 기홍(基洪)이고, 해산은 그의 호이다. 1878년 전라북도 임실 남면 국화촌 호전동(菊花村 狐田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잘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전해산은 그해 겨울 이석용(李錫庸)과 같이 전북 남원(南原)에서 기병하였다. 이들보다 일찍이 호남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고광순(高光洵)이 적에게 체포되고, 기삼연(奇參衍)이 일어나 활약하다가 그 역시 체포되자, 그 산하 의병들은 김 준(金準)의 휘하에 통솔되고 있었다. 이에 해산은 이석용에게 김 준과 연합할 것을 건의하였다. 김 준을 뒤쫓아 장성에 이르니 김 준 역시 순국하였다고 하므로 광주와 나주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김 준의 부장으로서 활약하던 오성술(吳聖述)과 연합하여 나주 도림(道林)에 주둔하였다가, 사천(沙川) 등지에서 적병과 교전하였다. 한편 김 준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曺京煥)이 의병장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해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극구 사양하였다. 1908년 6월 광주에서 모군하고 있는 데 정원집(鄭元執)이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부하 되기를 청하였고, 계속 세력이 확장되었으므로 7월 29일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의진을 다시 구성하였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선봉장 정원집(鄭元執)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도포장 이범진(李凡辰)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격문을 지어 원근에 돌리고 수하 장령들에게 특히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엄명하고 군령을 엄히 하였다. 적병과 전투하는 한편 친일적인 무리, 그 중에도 일진회원들을 경계하여서 김원범 등에게 명하여 일인에게 의병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던 변영서(邊永瑞)·박기춘(朴基春) 등을 총살시켰다. 첫 전투는 영광 불갑산(佛甲山) 전투였다. 7월 25일 삽시간에 적에게 포위 당하자, 선봉장이 천보총(千步銃)을 쏘아 두어 명을 사살하고 곧이어 선치(蟬峙)에 구멍을 파고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유인하여 기마병들을 죽이고 무기를 포획하였다. 한편 무기를 보충하고자 8월 23일 윤은경(尹殷卿)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조경환에게 무기를 보내었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일로 미루어 무기공급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알 수 있고 무기문제로 의병장간에 알력이 있었던 것은 관동의병장 민용호(閔龍鎬)와 김하락(金河洛)의 일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9월 도림(道林) 일대에 유진하고 있었는데 대봉산(大鳳山) 일대에 적병들이 운집하여 총성이 들렸다. 29일 나주 석문동(石門洞)에 이르러 조사해 보니 전일에 조경환이 순사대장 정득주(鄭得柱)를 죽였기 때문에 적병들이 거문돌(黑石) 윗마을에 불을 지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등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마침 전에 헤어졌던 군사들이 합세하여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일시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조경환의 의진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두 의진이 연합하여 적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사상자는 하나도 없었으나 수백 명의 군사가 흩어지고 수십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다시 행군하여 유정(柳汀)에 유숙하였다. 10월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장성의 김기순(金基淳)과 합진할 것을 꾀하나 서로 군사와 무기를 빌릴 것을 주장하여 합의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 구룡촌(九龍村)·대곡(大谷) 등을 행군하여 영사재(永思齋)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광주에서 파견된 수백 명의 적과 접전하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순창·담양 등을 거쳐 광주 대치(大峙)에서 다시 적과 대적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총과 탄환, 군복 등을 노획하였다. 주흥동(朱興洞)에 이르러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을 만나 크게 고무를 받고, 곧 순창 내동(內洞)으로 가서 적과 접전하다가 적이 불을 질러 후퇴하였다. 다시 함평 유덕산(有德山)으로 가서 참봉 김 돈(金燉)을 만나 전략에 대해 의논하였다. 김 돈은 김 준의 전략을 크게 도와준 인물이었다. 고막(古幕)의 적병참을 포위 공격하여 적을 몇 명 사살하였으나 선봉장 정원집이 크게 부상당하였다. 민가에 머물며 10여 일 치료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해산은 거의한 이래 오른팔 역할을 담당하던 정원집을 잃고 크게 상심하였을 뿐 아니라 의진의 사기도 다소 떨어졌다. 1909년 1월 17일 몰래 고향에 돌아가 부친께 세배를 올리고 가사를 처리하고 돌아왔다. 1월 18일 그는 '본 고을 반당(反 )에게 보내는 격문'을 써서 고향에 널리 반포케 하고, 또 '대동 의병장(大東義兵將)은 격문 대신에 노래 한 장을 지어 모든 회도(會徒)와 각도 보조원에게 통유하노라'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3월 27일 해산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광으로부터 부안으로 가서 오동촌(梧洞村)에 이르렀을 때 적의 내침을 받아 접전하다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다시 나주 땅으로 돌아와서 의병활동이 어려우므로 일시 휴식할 것을 훈시하고 곧 재기할 것이니 망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고향 진안(鎭安)으로 돌아갔다. 적은 해산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수탐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이때 해산의 의진에 출입하던 조두환(曺斗煥)이란 자가 영산포 헌병대 통역 김현규(金顯圭)에게 밀고하여 남원 고래산(古萊山)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친 지 수개월만에 일병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후 일인들은 갖가지 감언이설로 귀화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우국시를 남겼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바다 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이제는 영산강으로 다시 못가리니 두견새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書生何事着戎衣 太息如今素志違 痛哭朝廷臣作蘗 忍論海外賊侵圍 白日呑聲江水逝 靑天咽泣雨絲飛 從今別却榮山路 化作啼鵑帶血歸) 광주를 거쳐 1910년 정월 대구감옥소에 이감되어 박영근(朴永根)·심남일(沈南一)·오성술(吳聖述)·강무경(姜武景)과 함께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부하 중에 원인석(元仁石)·노한문(盧漢文)·박영근(朴永根)·이범진(李凡辰)도 그를 전후하여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로써 호남의진의 거봉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처는 그간에 시부모의 상을 홀로 치르고 있다가 그의 관이 돌아온 날 순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