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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1960년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장학생을 목표로 시험을 치렀다. 당년 3월 15일은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폭력과 회유로 정부통령 선거를 감행하는 날이었다.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3.15의거가 일어났고 열사는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총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경찰의 시위 진압과정에서 열사는 행방불명 되었고 이승만 정권은 3.15의거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용공분자들의 난동으로 몰았다. 어머니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열사는 27일만인 4월 11일 마산의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시신으로 떠올랐다. 공산당으로 내몰렸던 마산시민들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2차 의거에 돌입하였고 이 시위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 민족 최초의 민주혁명을 꽃 피웠다. 4월 11일 열사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에 4.19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1여년 후 군사 쿠테타에 의해 4.19 민주혁명은 짓밟히고 열사는 다시 묻혔으나 부마항쟁, 5.18, 6.10 민주화운동으로 되살린 불씨는 4.19 민주화혁명이다. 살아서는 사랑스러운 호남의 아들이었고 죽어서는 자랑스런 영남의 아들이 되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