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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었다. 평거에 아관대대로 염슬위자하여 고고한 기상을 흐트리지 않으시고 임사에 정사를 판별하여 의리소재에는 위난도 불사하셨다. 때에 국운이 비색하여 광무 9년 왜적의 강압으로 을사5조약이 체결되니 면암 선생을 비롯 한왜의거가 각지에서 일었는데 공은 면암 선생 휘하의 독립의군부에서 토왜격문을 사재로 인쇄하여 8도에 전포하고 백형 순진의 자금으로 화기를 구입하여 헌납했으며 의군의 정훈을 담당하여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활약하시다가 적에 피체되시어 전주감옥에서 수삭의 옥고를 치르셨다. 옥중에서 면암 선생 순국의 비보를 접하시고 방성통곡 음식을 전폐하여 기진함에 이르시니 그들도 경복하여 방환햇다. 광무 18년 월 고종황제로부터 종3품 통훈대부의 밀칙을 받으시고 구국일념으로 불태우시던 중 고종황제 인산때 대한문 앞에서 전국유림과 함께 예와 의와 신에 위배된 3대사를 사황께 진소하시고 이어 을사조약과 경술합방이 적신의 협박으로 체결되었음을 재소하셨으며 불국 파리에서 개회중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자생독립을 탄원하는 장서를 전국유림 137인 연서로 밀송하니 이를 역사에서 파리장서사건이라 하고 그를 기념하는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가 서울 장충단공원에 건립되어 있다. 남촌 곽경열을 통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밝혀져 왜경의 감시가 일거수일투족에 미치자 구국의 첩경이 민을 깨우치고 인재 양성함에 있음을 간파하시고 즐기던 주초를 끊으시고 후생계도에 진력하시다가 감격의 을유 해방 후 임진 10월 12일 향년 77세로 하세하시니 문인 여마자 수십명의 장송으로 송암리 산직동 선영하에 안장되셨다. 부거 후 11년 사론이 제발하여 면암 수남 양선생과 함께 도동사에 봉안되시고 송천문집 4권이 인간되었으며 정부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 밀양박씨는 규정공후인 준돈의 따님으로 사덕이 겸비하시고 공의 향학과 거의에 내조가 크시어 세인의 칭송을 받으신 분이시다. 4290년 정유 12월 2일 83수로 졸하시니 묘는 합펌하다. 2남 3녀를 두시니 장남 제선은 윤상 덕상 등 2남 3녀를 두었고 차남 제도는 석상 1남을 두다. 녀는 고흥류 종윤 전주최 동렬 연일정 운복에게 출가하였다. 오호라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