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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문 전주는 완산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전완이란 글자가 뜻하듯이 우리 시는 뚜렷하고 흠이 없고 온전한 고을입니다. 이곳 산봉우리에 완산이란 이름이 남아있는 것도 우연인 아닙니다. 그러나 고종 31년(서기 1894)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입성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동년 5월 8일 철수하기까지 관군과 이곳 완산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앞서 고부군수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접주들이 이끄는 농민군은 부안 백산에서 기포하고 정읍 황토현, 장성 황룡촌 등에서 관군과 싸워 크게 이기고 단숨에 전주부성까지 진격했던 것입니다. 조정중신이나 지방수령들의 부패, 탐학을 개탄하고 「초야의 버려진 백성일지라도 국가의 위태로움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다」는 동학창의문을 선포하고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조정안의 사대주의자들이 청국에 구원을 요청하자 일본군까지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봉준 장군은 자진해서 성밖으로 물러나 해산했습니다. 그후 청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은 왕실을 위협하고 국권을 탈취하려하자 동학농민군은 삼례에 다시모여 총궐기 하였습니다. 그후 공주까지 처올라갔으나 일본군에 의해서 패퇴하고 필경 남쪽바다 땅끝까지 몰리어 수만명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실로 근세 농민혁명의 효시요, 비록 비참하게 끝나기는 했습니다만 이 나라 민주주의와 자유, 정의의 씨를 뿌리고 가신 선각자들이었습니다. 때늦은 감이 있으나 이 고장 시민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서 이 아름답고 유서깊은 완산의 중턱에 옛일을 기리는 빗돌을 세워 선인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고 후손에게 깨우침을 남겨 온전한 고을을 이룩하는데 바탕이 되게 하고자 합니다. 서기 1991년 8월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문학박사 김영래 동위원 조병희 짓고 변산 김윤길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