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page


232page

海鶴 李沂 先生 救國運動 追念碑(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 추념비) 여기 나라와 겨레 사랑의 위대한 선각자 이기 선생의 거룩한 넋과 공적을 새겨 길이 기리고자 한다. 선생은 자 백증, 호는 해학, 본이 고성으로 1848년 전북 만정에서 나시었다. 일찌기 학문의 바탕을 실학에 두어 당시 정사의 혼란과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아 지키는 일에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치고자 하시었다. 그 지름길을 선진한 새 문물의 섭취로 겨레생활의 과학화를 꾀하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데 있다고 본 선생은 급무 8제의를 통하여 시급히 개혁해야할 여러 제도상의 방안을 주장하셨고 한때는 직접 국토의 측량과 세정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시었다. 당시 일제의 침략행위가 날로 들어나게 되자 선생은 비장한 결의로 일본에 건너가 일황과 정계요인에게 그들의 침략과 배신행위 부당성을 따져 크게 꾸짖기도 하시었다. 그러나 끝내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의분과 실망을 후진양성과 구국정론을 펼쳐 나가는 일로 돌리시었다. 한성 사범학교의 교관을 맡으신 일 대한자강회와 자신회를 조직,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무리들을 처다하고 국권을 굳게하여 달라는 상소문을올리는 한편 을사오적을 직접 제거하려다 진도까지 귀양가셨던 일 귀양에서 풀리셔서도 호남학보 등에 정부와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구국정론을 펼치셨던 일 그리고 의무교육 실시와 한글 사용을 주장하여 주체의식을 북돋우고자 하신 일 등이 모두 나라와 겨레 사랑의 투철한 정신의 발로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침략이 극에 이르자 선생은 서울 여사에서 단식절사하셨다. 이러한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선각자이신 역사적 위인을 우리 고장에서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전북도민의 끝없는 영예일 뿐 아니라 우리 향토의 크나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 우러러 선생의 높으신 뜻을 다시 여기에 돼새긴다. 되돌아볼 때 선생의 빛나는 생애와 의로운 넋은 조국광복으로 이어졌거니와 겨레의 무궁한 앞날을 두고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이어져야 한다. 후학 문학박사 전상기 근찬 여산 송성용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