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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굽힐줄을 모르고 재거를 도모하던 그의 몸마저 적에게 넘겨졌다. 적진에서의 늠름한 답변에 신문하던 적장도 도리어 그의 구명에 힘쓰도록 되었으며 최후의 그 순간 명복을 빈다는 왜송을 꾸짖어 물리치고 자신의 뒷일에도 불관하는 의기로 옥관을 꾸짖고 오직 「국권을 돌이키지 못하고 어버이 장례도 치루지 못하여 충도 효도 안되니 죽은들 어이 눈감으리」한 유서에 남긴 그 장렬함 국민의 울부짖음 「천일무광」이라 일렀으니 곧 광무 12년, 10월 21일이었다. 생각건대 선생은 초야의 선비로써 국가위급의 즈음 부름을 받았으니 그것이 좀더 일찍었더라면 또 비록 때늦어도 그 때 그 말씀이나마 시행되었더라면 그러나 이로서 그는 그저 일절 만의 선비 아니었음을 가히 알리라. 그리고 고래 우리 민족은 많은 침략에 대결한 민중 항쟁사를 가졌는데 그 때마다 관의병의 구별 없이 거족일치였고 혹 외국원조도 있었지마는 이 때의 우리 의병에게는 안팎으로 비부의자의 성원도 없었을뿐 아니라 도리어 매국노의 사역하는 우리 관군과도 싸우면서 조국에 바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