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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련하기에 애쓰고 또 여러 동지와 함께 신흥학교를 세워 청년교육과 군관양성에 힘을 기울었으며 1919년에는 독립운동의 남만주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창설했다가 뒤에 이름을 서로군정서라 고치고 최고책임자인 독판이 되시었다. 그리자 일본군이 만주에 침입하므로 독판의 명령으로 독립군을 출병시켜 청산리 봉오리 갑산리에서 승첩을 거두게하고 또 길림독군과 회담하여 교포의 길림성 거주를 자유롭게하는 외교상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1925년 58세 때에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여 정부 안의 사상적 분렬을 조화시키기에 적극 노력하다가 울분이 그대로 병을 이루어 사직하고 도로 서란으로 돌아와 마침내 1932년 5월 12일 75세를 일기로 만리 이역의 외로운 혼이 되시었다. 5년 뒤에는 아우마저 하르빈에서 별세하고 아들은 외로이 고향으로 돌아와 거하다가 이차대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세력이 팽창해가므로 조국의 독립을 비관한 끝에 1942년에 단도로써 자결하여 어버이의 뒤를 따랐으며 그 밖에 아우 상동과 종숙 승화 승히 조카 형국 운형 인형들도 일제에 항쟁하다가 혹은 옥고 혹은 옥사하니 세상이 일러 과연 의열의 가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이제껏 선생 형제를 반장하지 못한 것을 뼈아프게 여기더니 이제 고국 동포들이 힘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 선생의 높은 뜻을 길이 받들고자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이에 그날의 사적을 대강 적고 다시 옷깃을 가다듬어 노래를 바치노라. 사직이 무너지자 압록강 울며건너 찬 바람 만주벌에 흰 머리 날리시며 한평생 조국광복을 꿈 속에도 비시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