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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서기 1903년 7월 29일(음 6월 6일)에 출생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서기 1919년 당 17세에 동년 3월 28일 오후 1시경에 고종형 권영대 등과의 주도로 고현시장과 진동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이어 4월 3일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이 연합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를 삼진의거라 한다. 공은 이 삼진의거의 주동자 한사람으로 왜경에 체포되어 동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동년 10월 3일에 출옥하였다. 그 후에는 야학을 이르켜 가난한 이웃이 아들 딸들을 모아 우리의 글과 얼을 가르치고 심었다. 이로 인하여 왜경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 감시의눈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끝내는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시지 못하고 만주국 요양현 요양 신시가 189번지에서 영면하시니 향년 31세로 서기 1933년 3월 14일(음 2월 19일)이다. 다행이도 정부에서 그 공훈을 기려 서기 200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경주김씨와 사이에 무사하여 입양하니 중씨 창현의 자 영안이다. 공의 고귀한 그 절조 어찌 산만 높다하면 그 은공 또한 바다만 넓고 깊다 하리오. 공의 많은 행적을 줄여 이 돌에 새겨 남기니 만세에 변함없이 이 돌과 더불어 영원하리라.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일부 발취하여 기합니다.) 서기 2012년 4월 광산김씨 장악원 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