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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4월30일 월요일 2 (제136호) 기 획 왕건은 910년 이래, 채찍과 당근인양, 정복과 결혼을 병행 했다.이런혼인정책의구사또한전례없는것이었다. 동시대로 따져 봐도 견훤, 궁예와는 그 수적인 면에서 크게 다르다. 이른바 ‘자신의 몸을 무기로 내세운’ 통혼 정책의 추 진역시그의세력확대노력과무관하지않다. 왕건이결혼을통해세력기반을다졌다는점에서는김춘추 와 문희의 결혼과 하등 다를 바 없으며,더욱이 복수의 세력과 중첩적으로 결혼한 점에서는, 무릇 그가 가진 열망과 야욕이 김춘추의 경우와는 비할 바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그는 실제 김춘추의 위업을 의도적으로 깎아 내리려 한 흔적조차 보이 는데,휘하공신 배현경이 죽자무열이란 시호를 내린 것은 븮고 려사븯권1세가1태조9년조 그 단적인 예에 해당한다. 지난날 자신의 꿈에서 신라 정신 의 상징인 구층탑에 올랐다면, 현실에서 그는 김춘추의 호를 신하에게 내림으로써 통일의 상징 김춘추를 짓밟고 올라선 셈이된다. 그렇다면 왕건은 신라 3보 븮삼국유사븯권3 탑상4 황룡사 구층탑조 에의 지대한 관심에서 짐작되듯, 신라 병합이란 잠재된 욕망 을 키워가며 주변에 자신의 세력을 심는 전형적인 이중성을 가진 음모형(陰謀形)이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성격은 실제 남은기록으로도간취된다. 가령 920년 신라의 급박함을 전하러 온 김율이, 원치 않은 대답을 했을 때 왕건은 웃음을 보였고, 926년 견훤이 절영도 총마의 반환을 요구했을 때도 웃음을 보였다븮고려사븯권1 세가1 태조19년조,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애왕3년조,븮삼국유사븯권2기이 후백제 견훤조. 급박하고 당황스런 순간, 화를 내야 할 순간조차, 웃음 을 지었다는 것은 그의 성격과 심성이 쉽게 해석될 수 있는 보 편의 선을 넘어선, 결코 단조롭고 심상(尋常)한 것이 아님을 알게한다.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필요 이상의 웃음은 가식을 뜻한다. 왕건은 자연스런 감정을 발산하고 표현하는 대신, 타인과 상황을 의식해 감정을 조절하고 추스르고, 심지 어는상황에따라가장할수있었다는말과같다. 왕건의 이중성은 931년 2월의 서라벌 방문에서도 간취되고 있다.명색이 백제 견훤이 세운 김부가 왕으로 있었고 친 백제 계가 세력을 뻗치고 있는 서라벌을 방문하면서 왕건은 불과 5 0여 기만 거느린 채 기내(畿內)에 들어갔다. 븮고려사븯권1 세가1 태조14년2월조, 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순왕5년2월조, 븮고려사절요븯권1태 조 14년 2월조. 왕건은 서라벌에서만 수십일 머문 것이 기록 븮고 려사절요븯권1 태조 14년 2월조되어 있고 또 회군은 5월 20에 있었 다고 되어 있어 븮삼국사절요븯권14경순왕 5년 5월 정축조, 석 달 남 짓 서라벌인근에있은셈이된다. 왕건은 방문에 앞서 선필을 보내 그 사실을 통고했던 만큼 븮삼국사절요븯권14 경순왕 5년 2월조, 제반 절차에 소홀하거나 서두 르지 않은 치밀함을 보였다. 그런데 비무장으로 서라벌을 방 문한 것처럼 묘사된 기록이야말로, 겉으로만 비무장의 방문 이었을개연성을키운다. 외려왕건이이미상당수변복한병력을서라벌로침투시켜 신변 보장을 꾀한 다음, 겉으로 비무장의 연막을 내세웠을 개 연성이 높다. 불과 소수의 정기만을 데리고 들어간 비정상의 방문은, 불확정성이 전제된 당시 상황에서 흔히 있을 예가 아 니며, 그런 만큼 그 자체 정치적 쇼를 벌인 것에 다름 아니다. 왕건은 서라벌 방문 전년인 930년 2월, 동해 연안 110여 성의 투항을한꺼번에받았다.븮고려사절요븯권1태조13년2월조. 왕건이 견훤을 패퇴시켰다 해도, 신라의 변경을 잠식하고 있은이상신라인의적의를쌀가능성이컸다.935년마의태자 의 지 적 처 럼 신 라 의 입 장 에 서 신 라 를 지 키 려 한 일 군 의 國 粹 세력이 있었을 것이고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9년 10월 조 , 이들은 왕건의 속내를 꿰뚫고 경계, 또는 차단하려 했다고 짐작된다. 왕건의 비무장 방문은 이런 분위기 하에서 나온 모종의 역 설적 생존 전략이며,왕건 역시 신라의 거부감을 일면 느낀 결 과이기도 했다. 견훤이 서라벌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약탈을 자행하고,사냥을 시작했다면,왕건은 주변의 약탈과 귀부,곧 사냥을다끝낸다음서라벌입도를행하는입장이었다. 견훤이 무력과 노략이란 단순한 방법으로 신라를 침탈했다 면, 외려 왕건은 귀부와 투항이란 더 교묘하고 잔혹한 방법으 로이미신라를노략,잠식하고있었다. 견훤이 ‘범의 탈을 쓴 이리’라면,왕건은 ‘양의 탈을 쓴 살쾡 이’였다. 이 점에서 신라의 백성들이 “지난 번 견훤이 왔을 적 에는 이리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이제 왕공(王公)이 오매 부 모를 만난 것 같다.뷻라 말했다는 것은 당시 신라인의 정서가 아니며, 다만 고려인에 의해 걸러져진 신라 정서의 왜곡일 뿐 이다. 또 벽진 이총언의 귀부 이면에 보이는 치열한 왕건의 공작 과정에서, 왕건이 견훤과의 전면전에 앞서 얼마나 철저한 거 래와 회유, 포섭을 자행했고, 즐겨 구사했었던가를 짐작케 한 다. 왕건은후삼국통일전쟁을전쟁으로완성시켰다기보다,이 면 거래와 협상, 재물의 제공, 기존 지배권의 인정 등을 통해 구현하려 했다. 따라서 왕건은 경애왕의 전면전 요청에 소극 적일 수밖에 없었다. 경애왕과의 동맹에 있어서도 왕건은 시 종 일관 신라의 요청을 철저히 무시하고 방관한, 가장 불철저 하고불성실한동맹자였다. ‘옥대’란 진평왕이 천명(天命)을 가탁해 만든 상징물로 븮三 國遺事븯권1기이 천사옥대조 이후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여겨 졌다. 또 54년간 진평왕의 공고한 권력 기반을 제공한 역할로 ‘성제대(聖帝帶)’라고도불렸다. 김율이 왕에게 “고려왕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소위 장륙불상과 9층탑과 성대가 그것이라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하므로, 제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 다.”라고말하였다. (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명왕5년정월조) 920년 10월 왕건이 청구사(請求使) 김율을 논박한 일련의 사건은 신라 내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921년 정월,석 달 만에 고려에서 돌아온 김율이 경명왕에게 성제대의 존재를 말한 것이다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4년 정월조. 위에서 는 김율이 겪은 자괴심만이 경명왕에게 표현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은 그러했을 가능성은 적다. 국가 안위나 권력 정당성이 성제대와 연결될 수 있다는 대목이 더 중요하게 개진되었을 것이다. 박성으로서 왕권 약체에 직면해 있던 경명왕 입장에 서천사옥대,성제대의확보는새삼천명을과시할호재였다. 하지만 성제대 확보를 통해 경명왕이 천명을 과시하려 한 시도는 난관에 봉착했다. 결국 황룡사 노승(老僧)이 왕에게 진언하고서야 남고(南庫)의 성제대를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경명왕이 즉위 4년이 지났음에도 궁궐 내, 남고의 물품 항목 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과, 황룡사 노승만이 그의 소재에 대 한 답을 했다는 것은 왕의 권력 기반이 절대적이지 않은 증좌 다. 주목되는것은경명왕이황룡사세력의지지를엎고서도남 고의 성제대를 쉽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풍우가 갑자기 일어나고 대낮인데도 컴컴해져서 볼 수 없 었 다 .’는 것 은 진 평 왕의 정통성을 박성에게 물려주길 거부한, 김성 세력 등의 거 센반발과일면무관하지않다. 말 그대로 풍우와 암흑은 반란의 조짐이자 폭동이 일어날 정도의 거센 반발의 은유다.왕마저 건드릴 수 없을 만큼의 거 대집단의 시위란, 커다란 사병을 거느린 집단들이 반란을 일 으킬 태세였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경명왕대에는 한 차례 반 란도 있었다.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2년 2월조, 븮삼국사절 요븯권14경명왕2년2월조. 박씨 왕권에 저항할, 사병을 거느린 대표적 존재는 김성 집 단으로 여겨지며, 그럴 경우 진성여왕 말년에 보이는 효종이 주목된다.효종은 화랑으로 1천븮삼국유사븯권5효선9 빈녀양모 또는 기천 븮삼국사기븯권48 열전8 효녀지은 의 낭도를 거느린 것이 확인 된다. 기천을 수천 또는 몇 천이라 해석한 선례도 있다. 이재호, 븮삼국사기븯,光信出版社,1997,p.764 이와관련하여신당서의다음구절또한참고가된다. 재상가에는녹이끊이지않고녹이끊어지지않으며奴뚝이 3천이며 甲兵과 牛븡馬 돼지의 수도 이에 맞먹는다. 가축은 해 중의 산에 방목을 하였다가 필요한 때에 활을 쏘아서 잡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 주어서 늘리는데 기간 안에 다 갚지 못하 면노비로삼아일을시킨다.(븮신당서븯권236열전145동이전신라) 위 기록에 의하면 재상가의 노비가 3천이었다. 갑병의 숫자 또한 그와 근사했다. 노와 비의 수를 반이라 치고, 3천의 갑병 을 합치면 이들만 대략 무장시키더라도 5천의 병력에 육박한 다. 여기에다 위에 언급된 3천의 말을 보태면 재상가는 정기 3 천의 군사력을 보유했다는 말이 된다. 이 무력을 바탕으로 효 종은 헌강왕의 차녀 계아(桂娥)와 결혼했으며, 막강한 경제 력을 앞세워 지은의 구휼처럼,기아선상에 있는 백성을 선동븡 포섭해그세력을더욱키워갔다. 게다가 효종은 왕위계승에서 경휘(신덕왕)에 이어 승영(경 명왕)에까지 두 차례나 밀렸으니 마음속에 키워 온 반발의 정 도가 컸으리라 짐작된다. 경명왕은 이들 전부를 적으로 돌려 대결을꾀하기보다미온적대처로나갔다. 결국경명왕은왕명을거스른이들세력을강경하게거세하 거나 철저히 족멸하지 못했다. 반대나 저항 세력을 철저히 탄 압하기는커녕 외려 왕이 제계하고 택일하는 근신을 통해서, 성제대 친견의 뜻을 이뤘다. 이미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김유 신 븮삼국사기븯 권43 열전3 김유신 下 을 다시 흥무대왕으로 추봉하 는행사를열기도했다.븮삼국사절요븯권14경명왕7년11월조 경명왕이 왕권을 행사해 김성 세력들을 제어하기는커녕 그 들의 반발을 의식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부심했고 또 무 마하려 한 점은 반대 세력을 끝내 전도하지 못한, 할 수 없는 왕권이 지녀야 하는, 원천적이고 숙명적인 비애를 엿보게 한 다. 이들저항세력의불온한행동은차단당하기는커녕,경명왕 의 미온적 대응으로 말미암아 더 고조되게끔 이르렀고, 그 기 세가 마침내 은밀화되고 공고화되어 7년 뒤, 927년 포석정 사 건의변란과경애왕의피살로이어졌다고믿어진다. 성제대사건을둘러싼일단은박씨왕을교체하려는무엄한 시도로 잠재해 이어졌고, 경애왕이 부닥치게 될 포석정 비극 의불씨로남았다고보인다. 결국 왕에 대한 끈질긴 저항과 도전으로 이어진 일련의 불 협화음은 왕과 반대 세력 간,일종의 힘겨루기 성격을 지닌 것 으로 신라 정계 하나의 커다란 폭풍이었고, 7년 뒤 있을 파국 의전조(前兆)라비춰진다. 당시 경애왕은 경명왕의 왕제(王弟)로서, 앞서 논했듯, 태 자의 위에 있었다. 그런즉 경애왕이 천사옥대의 사건을 뚜렷 이 기억했을 것은 당연하고 또 왕건의 내면 깊숙이 깔린 복심 역시충분히간파했을것은당연한일이다.따라서이로부터5 년이 지난 925년, 대립을 촉구한 경애왕의 서한은 견훤과 왕 건의 세력약화와 대립을 유도하는 책략의 구사였다고 믿어진 다. ‘반복(反復)하여 거짓이 많다’는 철저한 인신공격이나 극 단적 조치 이면엔, 둘의 분열과 대립 조장이란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여기서 경애왕이 견훤에 대한 야멸찬 공박을 했다는 점은 충분히 되새겨 볼 가치가 있는데, 글자대로의 뜻만 따지면 견 훤을 공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둘의 화의를 결렬 시키려는 것이었고, 동시적 의미에선 그 견훤과 화의를 구축 하려한왕건에대한은연의공박이기도했다. 또 경애왕은 영천을 접수한 왕건과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려 했기보다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두 반란자 집단을 교묘히 회유, 대립을 조장하는 방향, 곧 이이제이(以夷制夷) 의정국을이끌었다고믿어진다. 우선 경애왕은 왕건에게 화친의 불가함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견훤의 거짓 사례들도 낱낱이 거론했을 가능성이 크 다.그경우가장먼저견훤의아비아자개가아들을버리고왕 건에게 투항한 전례가 거론되었을 것이다. 전술한 바대로 왕 건은 견훤의 이중성을 체험한 바 있었고, 경애왕의 지적이 옳 다고 자언하면서도 끝내 화의의 길을 택했다 븮고려사븯권1 세가1 태조 8년 10월조, 븮삼국사절요븯권14 경애왕 2년 10월조, 븮고려사절요븯 1권 태조 8년10월조 . 이를테면 왕건-견훤의 공존 틀이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자 다음 달 견훤은 탐라에서 나오는 특산물을 왕건에게 화의의 징표로보냈다.븮고려사절요븯1권태조 8년11월조 견훤은 권력기반을 반 신라에 두고 있었다. 신문왕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안승의 보덕국은 완산의 영역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해도 여전히 유혈의 앙금은 남아 있었다고 믿어진다. 견훤이 백제의 기원을 금마산이라 자언한 것 역시 이 같은 맥 락을 고려한 것이라 보인다. 븮삼국유사븯권1기이1마한조. 또김춘추 의 사망 직전금마저에 피가흘렀다는 구절도 백제인에 대한 학살과 연관 지어생각할수있다. 궁예가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반역의 鄕 명주를 기반으로 신 라 타 도 를 외 친 것 역 시 같 은 이 치 였 다 . 실 제 궁 예 는 4 년 뒤 신라 타도의 결의를 행동화해, 신라를 멸도로 부르고 신라에 서 온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궁예 천우 2년 조 견훤도 궁예처럼 자신의 기반을 舊백제 지역에 둔 이상 권 력 존립의 근거를 ‘타도 신라’의 명분에 둘 수밖에 없었다. 궁 예와 견훤은 서로 대립했으나, 신라와의 관계에선 ‘타도’라는 일관된 명분을 유지해 혼선이 없었다. 신라 타도를 외친 점에 서 둘은 동맹자나 다름없었고, 신라 영역의 잠식 경쟁에 있어 서는선의의경쟁자였다. 하지만왕건의집권이후상황은거의돌변했다. 왕건은 신라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거래의 대상으로 보았 다. 강한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약한 둘의 연맹이 필요하고, 그럴수록 신라의 존재는 필요한 법이었다. 왕건은 장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거래와 이재(理財)에 밝았으며 재물로 사 람을부릴줄알았다. 무엇으로 사람을 마음을 사로잡으며 어떻게 해야만 이득을 남길 지를 꿰뚫고 있었다.중폐비사(重幣卑辭 재물을 후히 주 고 말을 낮춰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음)는 왕건 개인의 자질일 수 있겠으나 그보다 상업의 과정에서 집안 대대로 길러진 일 종의형질이었으며생존의기술이었다. 생래적 형질을 물려받은 왕건은 적어도 그 점에서 견훤을 압도하고 남았다. 왕건이 신라를 거래의 대상으로 보려는 전 혀 새로운 전략 앞에서 무용을 앞세운 견훤은 더욱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박순교,〈견훤〉,븮역사속경북의혁신인물븯경상북도,20 06,p.81 그렇다고 견훤이 ‘親신라’의 정책을 새삼 구사하는 것은 자 신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 었다. 또 발해 유민의 포용과 같은 풍부한 배후 세력 공급원을 가 진 왕건과 달리, 세력 확장을 위해서 견훤은 불가피하게 신라 영토를 잠식하지 않으면 안 될 지정학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 다. 이처럼 견훤은 신라 타도를 외치며 집권했고 신라 공격을 통해서만 세력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견훤과 경애 왕이화합할가능성은원천적으로차단되어있었다. 경애왕은염원대로정국이전개되지않자고립된외교의돌 파를도모한선에서거란에사신을보냈다. 신라가 거란에 사신을 보낸 것은 915년 10월 처음 파견한 이 래 두 번째였다. 경애왕은 하필이면 고려와의 관계가 미묘해 진 순간 고려의 북변에 있는 거란에게 11년 만에 사신을 보냈 다.915년 당시 궁예 정권 때였으므로 거란에의견사는해로였 을가능성이크다. 그렇다면 925년 경애왕이 보낸 견사 또한 해로였을 것이고 왕건과는 무관하다고 봐야 한다. 결국 거란에의 견사는 왕건 에대한견제였을가능성이크다. 하지만 견훤이 두 달이란 짧은 기간 만에 화의를 뒤집고 전 격적 공세에 나섰다. 이것은 발해 유민의 고려에의 대거 유입 에따른위기의식때문이라여겨진다. 925년 12월 거란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발해 忽汗城을 포위 하자 발해국의 世子 大光顯 등 전후 수만 戶가 도망하여 왔다. 925년 12월,견훤은 거창 등 20여 성을 전격 공격하였다. 견훤은 고려 북변의 불안과 변동을 이용해 군사 작전을 벌 였다고 짐작된다. 거란이 발해를 공격한 것은 12월이었으나 븮고려사절요븯 1권 태조 8년 11월조에서는 이 때 발해가 멸망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발해의 사신이 926년 정월 신라를 방문한 것으로 보아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븮민족문화대백과사전븯 연표 북방의 전쟁은 12월에 서이듬해정월까지걸쳤다고생각된다. 견훤의 군사 공격에 자극받은 고려 내에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이듬해인 926년 4월 백제에서 보낸 질자 진호가 고 려에서의문의죽음을맞이한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거창 등 20여 성을 공략한 견훤의 군사적 움직 임과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病死 븮고려사절요븯 1권태조 9년 4월조 또는 자연사였는지 알 수 없다.견훤은 일단 그의 죽음을 피살 이라 판단했고 군사를 일으켰다. 최소한 이 점에서 평소의 진 호는건강했음이틀림없다.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3년4 월조 견훤은 즉시 왕신을 죽이고 웅진을 친정했다 븮고려사절요븯 1권 태조 8년. 왕건은 일대의 여러 성에게 성벽을 굳게 지킬 뿐 일 체응전하지말도록했다.븮고려사븯권1세가1태조9년조 경애왕은 이 때 왕건에게 다시 사신을 보냈다. 기록상으로 만 보면 14개월만의 일이었다. 경애왕은 서한에서 왕건의 결 전을촉구했다. 신라왕이사신을보내말하기를,“견훤이맹약(盟約)을어기 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우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 번 북을 울리는 위세를 떨치시면 견훤은 저 절로패할것입니다.라고하니왕이사신에게이르기를”내가 견훤을두려워하는것이아니라죄악이가득차서절로쓰러지 기를기다릴뿐이다.”하였다.(븮고려사븯태조9년조) 왕건은견훤에비해열세였음은정면대결을꺼린사실들에 서 드러난다. 성문을 닫고 싸우지 말라거나, 때를 기다린다는 것 등은 견훤이 우세였음을 보여준다. 그럴수록 세력변화를 꾀하는경애왕은반드시죽여야할대상이되었다. 경애왕은화의를결렬시키기위해14개월전견훤을폄하했 었는데,이번에는 왕건을 부추겨 뜻을 이루려 하고 있다.경애 왕은왕건에게대왕이란칭호를사용했다. 이는경애왕외교기조가어디까지나이이제이의선상에있 었음을 말한다. 그랬기에 거꾸로 신라가 고려의 왕건을 이이 제이의 대상이 아닌, 대등한 결속을 도모하는 동맹자로 간주 하고 있음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고, 상대인 왕건에게 인지시 켜 줄 현 실 적 필 요 에 서 이 같 은 정 치 , 외 교 적 수 사 (修 辭 ) 의 사 용이있었다고믿어진다. 왕건은 경애왕이 보낸 신라 사신의 편에 즉답을 전달하지 않았다. 왕건이 즉답을 피한 것은 경애왕의 요청이자 건의를 묵살한 것과 같다. 정확히 말하면 왕건은 견훤과의 정면 대결 을원하지않았고,외려두려워하고있었다고믿어진다. 왕건이 별도의 사신을 신라에 보내 뜻을 전달했다는 것은 시간을끌었음을시사한다. 이중 ‘죄악이 가득 차 견훤이 절로 쓰러지기를 기다릴 뿐이 다.’란 대목은 왕건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는 7년 뒤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하고 신라 왕경을 노략함으로 써 민심을 잃고 마침내는 경애왕의 복수를 다짐하던 고창 토 호들의 역공에 직면, 천하대세의 다툼에서 견훤이 영원히 밀 리게 되었다는 점에서만 보면 왕건의 혜안이 담긴 참언에 가 깝다. 또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왕건은 경애왕의 불행을 은연중 기다려자신의몫을챙긴것처럼비치기도한다. 당시의시점에국한하면왕건은발해유민의수용이탄력을 얻고 있었고 자연스레 군사력의 증강도 예상되고 있은 터라 왕건은 자신보다 우세한 견훤과 위험한 정면 대결을 고집할 까닭이없었다. 또 무엇보다 견훤에 비해 현격히 뒤지는 전력의 열세가 가 장큰이유였다.븮삼국유사븯권2기이 후백제견훤조 결국 왕건은 경애왕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스케줄에 따라 전쟁을 도모하려 했고, 그 원칙을 버리지 않았 다. 견훤은 이 때 절영도의 말을 돌려주길 요청했다. 이것은 퇴 군 조건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말을 왕건이 돌려준 것 역시 븮고려사븯 세가1태조9년4월조. 이 때돌려준말과 관련한 기록은다음에 보인다. 八月에 甄萱이 使者를 보내와 絶影島(釜山市 影島區)의 총(옥색) 馬 한 필을바쳤다.(븮고려사븯세가1태조7년8월조) 견훤과의 확전을 원치 않은 증거가 된다. 실제로 이후 개전 의 기록이 없다.이 점에서 견훤과 왕건 사이의 화의는 성사되 었다고짐작된다. 926년 12월 왕건은 다시 서경에 행차해 주군을 순시했다. 븮고려사절요븯1권태조9년12월조 왕건이단순히서경만을행차하지않고인근의주군까지섭 렵했다는 것은 그 목적이 광범위한 북변의 위무와 포섭에 있 었음을 말한다.거란의 남진에 대비한 조치일 수도 있고,아니 면 발해 유민의 흡수를 위한 적극적 행위일 수도 있다.아니면 둘다일수도있겠다. 이즈음 경애왕은 다시 왕건에게 사신을보냈다고 믿어진다. 왜냐하면 927년 정월 신라와 고려는 연합작전을 펼치기 때문 이다. 927년 벽두부터 왕건과 경애왕은 전면적인 파상 공세를 시 작했다.븮고려사븯권1 세가1 태조 10년 정월 을묘조, 븮삼국사절요븯권14 경 애왕4년정월을묘조,븮고려사절요븯1권태조10년정월조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 27) 뱚역사비정(16) Ⅰ.왕건의가면(PERSONA) 뱚Ⅱ.왕건과성제대(옥대) 뱚Ⅳ.경애왕의외교노선 박 순 교 뱚Ⅲ.효종의세력과움직임 뱚Ⅴ.후삼국세력관계의변화 뱚Ⅵ.경애왕의활동과왕건의변화 목 차 Ⅰ.왕건의가면(PERSONA) Ⅱ.왕건과성제대(옥대) Ⅲ.효종의세력과움직임. Ⅳ.경애왕의외교노선 Ⅴ. 후삼 국 세력 관계의 변화. Ⅵ.경애왕의활동과왕건의변화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