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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4월30일 월요일 12 (제136호) 기획 우리나라역사에부자가대를이어충신으로시호를받고정려를받은일은드문일이다.임진왜란에포의(布 衣)로서의병(義兵)을일으켜큰공을세우 고전사한의민공박이현선생의충절과자신의전공을남에게준아름다운미담은두고두고회자된다.그리고 그의아들충장공영서는역적(逆賊)이괄 (李适)의반란(叛亂)을제압하기위해선봉장이되어중과부적으로사로잡혔음에도수괴이괄에게반란의책 임을물어꾸짖고,회유에도굴하지않으며 목숨을내놓은충절은우리역사에길이남을만하여조정에서는부자의충절을기리기위해시호와함께정려 를내렸다. 특히불사이군의충절을보인순천박씨판윤공(휘可權)의후손인의민공과충장공부자의충신문(忠臣門)은 순천박씨판윤공종중이충효가(忠孝家)임 보여주고있으며,그들의충절(忠節)은청소년들의인성과공직자들의국가관형성에도큰도움이될듯하여알 아본다. 문(門)은 가문(家門)을 뜻하고 충신문(忠臣門) 이라 하면 충신의 가문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대 표적인 충신가문으로는 순천박씨 판윤공 가(家) 를 꼽을 수 있다. 판윤공의 후손들이 충(忠)과 효 (孝) 그리고 절(節)을 숭상하며 충절신과 효자의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판윤공의 행적에 서 찾아 볼 수 있어 지난 해 판윤공파 약사에서 다 룬 바 있 으 나 다 시 한 번 더 상 기 해 보 고 자 한 다 . 개성판윤공(휘 가권)은 무과에 등제하여 도첨 의시중(都僉議侍中)에 올랐고, 공민왕을 공근 (恭勤)히 섬겨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오른 휘 천상(天祥)의 3남 1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 다.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어렸을 때부터 옛날 사기(史記)를 읽었는데 충신전(忠 臣傳)이나 효자전(孝子傳)을 볼 때는 개연(慨 然)히 경의(敬意)를 표하여 「남의 신하가 되거나 아들이 된 사람은 당연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 다.」라고 하고 그 글을 다 읽은 후에는 좋은 글귀 를발췌하여삶의지표로삼았다.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개성 판윤에 올 라 재임 시 공평하고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칭송받았으며, 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친(父親, 평 양부원군)의 상(喪)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집 으로 돌아와 상례(喪禮)를 지키며 3년 상(喪)을 마치므로 효자(孝子)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 나 판윤공은 조정에 있을 때 난리가 날 징조가 엿 보이므로 항시 벼슬에서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기(喪期)를 마칠 무렵 국가에 이미 역성혁명(易姓 革命)이 일어나 조선조(朝鮮朝) 가 개국되니 두문동(杜門洞)을 나와서 조령(鳥 嶺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경계에 있는 고개)을 넘어 남쪽 가야산 (伽倻山)에 도착하였는데 마을과 산곡(山谷)이 깊고 나무가 울창한 것을 보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기로결심하였다.(서기1393년) 이때야은(冶隱)길재(吉再,1353년~1419년)선생 도 일선(一善, 현 구미시)의 금오산(金烏山)으로 들 어가므로 세상 사람들은 길입금오 박입가야(吉入 金烏 朴入伽倻)라고 하였다. 가야산은 산벽(山壁) 이만길이나되어공(公)의절의(節義)와같았다. 그리고 깊은 산곡도 그윽하고 아름다운데다가 대숲과 잣나무도 많았으며 방명(坊名, 동네 이 름)도 지사(志士)라고 하였으니 그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곳에 잡목을 베어내고 집 한 채 를 지어 놓고 살면서 상록수를 많이 심어 그 우호 (寓號)를 죽백리(竹柏里)라고 하였으며, 또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을 수륜동(修倫洞)이라고 하여 그 의 수양이 윤리(倫理)를 지키는데 있음을 나타냈 다. 이때 신조(新朝)가 이미 들어서서 은둔한 고 사(高士, 인격이 고결한 선비)를 찾으므로 그의 친족과 친구들은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아 판윤공 의 경륜(經綸)을 추대하니 태종조(太宗朝, 이방 원)에서 세 번이나 정경(正卿, 정이품의 벼슬인 의정부 참찬, 육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홍문관 대 제 학 등 을 이 르 는 말 ) 으 로 불 렀 으 나 공 ( 公 )은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으며 ‘나는 왕씨(王氏)의 신하인데 어찌 이씨(李氏)에게 벼슬을 할 수 있 겠는가?’라고 함으로 태종은 공의 뜻을 가상하게 생각하여억지로기용하지않았다. 이처럼 판윤공의 충절과 청백함 그리고 효성은 후손들의 삶의 지표가 되어 장남 유성(柳星)은 태종 9년(1409년)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기질이 특이하고 문무겸전의 재주가 탁월하여 판윤공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일찍 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판윤공의 유훈을 받들어 출사하였다. 종성부사(鍾城府使, 현 함경 북도 종성군)로 나아가 공평청렴하고 자애로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은 공덕비를 세워 은혜와 공덕을 칭송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는 그 행색(行色)이 너무도 소연(蕭然)하여 임금 이 그 청렴함을 가상히 여기어 청백리로 봉하여 단서(丹書)를 내리고 의주목사를 제수하니 더욱 엄하고 튼튼하게 변방을 방비하고 위민선정(爲 民善政)을베풀었다. 목사공은 인손(仁孫), 예손(禮孫), 신손(信孫) 삼형제 두었는데 장남 인손은 승사랑(承仕郞)으 로 효우(孝友)가 돈독하고 재덕을 겸비하였고, 차남 예손은 어모장군충무위부사맹으로 타고난 효자이다. 부모님 상을 당해 피를 토하듯 슬퍼하 며 3년 상을 치르고 1495년 합천 야로 숭산 남교 (현 야로면 매안리)로 이거하여 아들과 사위(한 훤당 김굉필)의 학업을 위해 숭산(현 매안리 989 번지)에 소학당(小學堂)을 건립, 이들에게 학문 의 대성을 이루게 하였고, 현손 이문(而文)과 이 장(而章)은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이장(而章)은 1586년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제 수 받은 후 1591년 5월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 (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2년 1 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 가지 않았다.4월에 왜적이 대규모로 침략해오자, 창의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헌을 하여 호 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선무원종공신(宣武 原從功臣)에 모두 책록 되었고 난이 평정된 후 주 요 요직을 거쳐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관혼촬요 (冠婚撮要)’, ‘정서절요(程書節要)’, ‘육경려해 (六經련海)’, ‘심경촬요(心經撮要)’, ‘상재만록 (桑梓漫錄)’등많은 저서를 남겼다. 삼남 신손의 호는 모헌(慕軒)으로 상서원주부 (尙瑞院主簿)이다. 4세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 여 효 (孝 ) 자 ( 字 )의 뜻 을 묻 는 등 천 성 으 로 효 (孝)가 지극하였다. 아버지 목사공과 모부인 정 부인 수주김씨가 병석에 누워 위독할 때 손가락 을 깨 물 어 그 피 를 드 시 게 한 후 1 0 여 일 을 연 명 하 게 하 는 대 효 (大 孝 ) 로 향 리 의 칭 송 을 받 아 관 찰 사는 그를 효렴(孝廉)으로 아뢰어 주부(主簿)를 제수하였다. 특히 학문이 깊어 만년에는 경북 군 위 의흥 이전동에 살면서 시주(詩酒)를 즐기다가 여생을 마쳐, 충신 의민공(휘 이현)과 충장공(휘 영서) 부자(父子)는 이렇듯 충효의 가문에서 성 장하게된것이다. 충신박이현의자(字)는여수(汝粹),호는창애 (蒼涯)이다. 아버지 대영(大榮)은 금계 황준량(1 517∼1563)과 교유(交遊)하였으며, 통덕랑(通德 郞)이고, 경릉(敬陵) 참봉(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으로 재주가 높고 기질이 아름다운데다가 효 행이 지극하여 무슨 일이든 할 만 하였지만 이어 받은 유업(遺業)이 부유하여 공명(功名)을 멀리 하고 산수를 좋아했으며 어머니 박씨는 고려 말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인 두문동 현인 송은 선생 의후예소요당하담(河淡)의따님이다. 1544년 4월 14일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재주 가 영민하고 지모(智謀)가 뛰어나 남명 조식 선 생의 사랑을 받았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죙, 1540∼1603),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 0)등과 도의지교를 맺어 서로 시문을 강론하면서 그의 유풍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동쪽 산 밑에다 집 한 채를 지어놓고 그 집을 창애서실((蒼厓書 室)이라 하였으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 고,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과 강마 (講磨)하고 종유하면서 경의(敬義)의 요지를 듣 고체인(體認)하였다. 1592년(선조 25년)에 왜적이 침입하자 임금이 용만(龍灣)으로 거동하니, 그가 서생(書生)으로 집에 있다가 국사가 급한 것을 보고 의연히 살고 자 하는 마음 없이 집안 동생 이장(而章,용담공) 과 더불어 동지들과 창기(倡起)하였다. 그는 의 병 대장 김면(金沔)의 군(軍)에 가담하여 성주 (星州) 가천(伽川)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나 겨울에 무주로부터 회군하다가 추위와 군세의 부 족으로 포로가 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전사 하였다.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으로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특별히 공조참의(工曹參議) 에 증직하였고, 사림들은 그를 덕봉서원 충렬사 에 배향 추모하였다. 1624년에 그의 아들 영서(永 緖)의 사절(死節)로 인하여 1644년(인조 22년) 에공조판서로증직되었다. 1624년에 그의 아들 영서(永緖)의 사절(死節) 로 인하여 영조18년(1742)12월 14일 공조판서로 증직되었고,의민(毅愍)의시호가내려졌다. 충신 박영서의 호는 주봉(柱峯)으로 아버지 의 민공과 어머니 팔거도씨(八 과都氏, 성주)와의 사 이에 아들 사형제(종서, 흥서, 영서, 윤서) 중 셋 째아들로 1579년 태어나 1602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신(戊申,1608)에 영건권관(永建權官, 함경도 영건보의 높은 관원)이 되었고, 광해군 을묘(光 海君乙卯, 1615)에 옥구현감(沃溝縣監)에 부임 하여 선정(善政)으로써 의비(衣緋)를 받았고, 임 술(壬戌,1622)에 창성대도호부사(昌城大都護府 使)에올랐었다. 인조 갑자(仁祖甲子,1624)에 도원수 장만(都元 帥張晩)의 선봉장(先鋒將)으로 관서(關西)에 이 르렀을 때 마침 부원수 이괄(副元帥 李适)이 반기 (叛旗)를 들었는데, 거느린 장수(將帥)들이 모두 항왜용사(降倭勇士, 조선군에 항복한 포로)였으 므로 원수군(元帥軍)이 그 흉한(凶悍)을 두려워 하여 감히 진격(進擊)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에 홀로 싸우기를 청하여 남이흥(南以興) 정충신(鄭 忠信)과 함께 각기 장병(將兵) 3000을 거느리고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교전(交戰)하여 남이흥 (南以興)정충신(鄭忠信)의군사(軍士)가먼저무 너졌으나 충장공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달려 이괄 의 진(陣)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리하여 거의 이괄 을 잡을 뻔 했는데 갑자기 말이 거꾸러져 도리어 피금(被擒)되어이괄이항복을받고자하였다. 이에 이괄의 장수 한명련(韓明連)이 또 그의 용력(勇力)을 아껴 감언이설로 꾀니 크게 화를 내며 자기 손으로 타던 말을 베며 ‘내가 너에게 잡 히게 된 것은 이 말 때문이다.’ 하고 마구 꾸짖으 면서 꺾이지 않았다.한명련이 또 초모(貂帽,담비 모자)를 그 머리에 씌워주니 머리를 흔들어 초모 를 떨어뜨리며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역적의 초모로충신의머리를더럽힐수는없다.’하였다. 그러므로 역적들이 그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긴 칼로 찍어대니 살갖과 살점이 조각조각 땅에 떨어졌는데 죽을 때까지 여전히 꾸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인조가 그 소식을 듣고 탄 석(歎惜)해 마지않으며 특별히 병조참판에 증직 하고또정려(旌閭)하라고명하였다.(1624년) 그리고 1624년 7월 17일 절개를 지키다 죽은 박 영서의 어머니에게 늠료( 먹料, 지방관리에게 주 는 녹봉) 6斗를 지급하라고 하고 같은 해 10월24 일예조좌랑권성오를보내어치제토록하였다. 1625년 7월 26일 진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 고, 숙종17년(1691년) 10월 23일 정려가 내려지 고 영조 18년(1742년) 12월 14일 병조판서에 증 직되고 시호(諡號, 忠壯)가 내려졌으며, 사림(士 林)들은덕봉서원충열사에봉안하였다. [영조실록 56권, 영조 18년 12월 14일 기해 2번 째 기사]1742년 청 건륭(乾隆)7년 ‘정석오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한남군, 박이 현,박영서박지계등에게시호를내리다’ 『정석오(鄭錫五)를예조 판서(禮曹判書)로,윤 심형(尹心衡)을 부응교(副應敎)로, 박춘보(朴春 普)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고(故) 한남군 (漢南君) 어(□)에게 정도(貞悼)란 시호(諡號) 를, 증(贈) 판서(判書) 박이현(朴而絢)에게 의민 (毅愍)이란 시호를, 증 판서 박영서(朴永緖)에게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증 판서 박지계(朴知誡, 함양인)에게 문목(文穆)이란 시호를, 좌찬성(左 贊成) 정제두(鄭濟斗)에게 문강(文康)이란 시호 를,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시환(金始煥)에게 효 헌(孝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어(□)는 세종대왕 (世宗大王)의 열세 번째 왕자(王子)인데, 단묘 (端廟)가 손위(遜位)한 뒤 함양군(咸陽郡)에 안 치(安置)되었다가세조(世祖)정축년(1547년)에 화의군(和義君) 영(瓔)·영풍군(永 銀君) 전( 櫻) 과 더불어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의 화(禍) 에 같 이 죽 었 다 . 숙 묘 (肅 廟 ) 때 와 서 추 부 (追 뻤) 하는 예(禮)를 거행하면서 그 당시 절의(節義)를 바쳤던 여러 신하들을 복작(復爵)하고 증시(贈 諡)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한남군의 자손만은 유 독 몰락하여 미처 역명(易名)을 청하지 못하였으 므로,이 때에 와서 비로소 증시한 것이다.박이현 은 순천(順天)사람이고, 박영서는 이현의 세 번 째 아들이다. 박이현은 임진왜란 때 포의(布衣) 로 성주(星州)에서 창의(倡義)하여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서로 호응(呼應)하는 형세를 이루어, 누차 왜적(倭賊)과 싸워 참획(斬 獲)한 것이 많았는데,군대가 패배하게 되자 죽고 말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특별히 공조 참의 (工曹參議)에 증직(贈職)하였다. 박영서는 무과 (武科)에 올라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었으며, 갑자년(1624년)이괄(李适)의 난(亂) 때 원수(元 帥) 장만(張晩)의 군사를 따라 적(賊)의 후미를 쫓아 황주(黃州)의 신교(薪橋)에 이르렀는데, 원 수의 군사들이 겁을 내어 감히 진격하지 못하자, 박영서가 홀로 분격(奮擊)하여 용맹을 뽐내며 말 을 달려 이괄의 진중(陣中)으로 뛰어들었다. 그 리하여 거의 이괄을 잡을 뻔했는데 갑자기 말이 거꾸러져 잡히니 이괄이 항복을 받고자 하였다. 이괄의 장수 한명련(韓明連)이 또 그의 용력(勇 力)을 아껴 감언이설로 꾀니, 박영서가 대로(大 怒)하여 자기 손으로 타던 말을 베며, ‘내가 너에 게 잡히게 된 것은 이 말 때문이다.’하고,마구 꾸 짖으면서 꺾이지 않았다. 한명련이 또 초모(貂 帽)를 그 머리에 씌워주니,박영서가 머리를 흔들 어 초모를 떨어뜨리며,‘내 머리는 자를수 있어도 역적의 초모로 충신의 머리를 더럽힐 수는 없다.’ 하였다.역적들이 그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긴 칼 로 찍어대니 살갗과 살점이 조각조각 땅에 떨어 졌는데, 죽을 때까지 여전히 꾸짖는 소리가 끊어 지지 아니하였다. 인조(仁祖)가 듣고 탄석(歎惜) 해 마지않으며 특별히 병조참판(兵曹 핫判)을 증 직하고 또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당저(當 콕) 을묘년(1735년)에 사도(四道)의 유생(儒生) 들이 함께 그 부자가 사절(死節)한 정상을 하소 연하자 마침내 판서로 더 증직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증시(贈諡)한 것이다. 박지계는 함양(咸陽) 사람으로 학문이 독실하고 조행(操行)을 가다듬 어 성명(盛名)이 있었다. 인조조(仁祖朝)에 초선 (抄選)으로 나아가 대헌관(臺憲官)을 거쳐 승지 (承旨)에 이르렀는데, 장릉(章陵)을 추숭(追崇) 할 때 전례(典禮)를 잘못 의논하여 사림(士林)에 게 비방을 받았다. 김재로(金在魯)의 조부(祖父) 김극형(金克亨)과 원경하(元景夏)의 조부 원두 표(元斗杓)가 모두 그의 문인(門人)이었기 때문 에 김재로가 연석(筵席)에서 그 덕행을 아뢰어 절혜(節惠)의 은전을 더하고 이조 판서로 증직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 박 선 교 ( 朴 善 交 ) 가 상 언 ( 上 言)하여 정려(旌 閭)를 청하니 특 별히시행하다.] 유 학 ( 幼 學 , 벼 슬 하 지 않 은 유 생) 박선교(朴善 交)가 상언(上言, 백성이 임금에게 올리는 진정서) 한 점 을 운 운 (云 云 )하 기 에 이 상 언을 보니, 그의 고조(高祖) 이현 (而絢)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포의(布 衣,선비)로써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막하(幕 下)의군사로써여러번의로운공을세웠습니다. 성주의 가천에서 전사(戰死)하시니 그 의로움 을 조정에서 듣고서 공조참의를 내리도록 하시었 고, 그의 증조 영서(永緖)는 갑자년(1624) 이괄 의 난에 도원수(都元帥, 장만)의 선봉장이 되어 황주에서전사하였습니다. 인조조(仁祖朝) 특별히 병조참판에 증직하시고 정려를 명하였습니다. 그의 고조 이현(而絢)은 특 별히천은(天恩,임금의은덕)을입고자하옵니다. 이미 그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아비의 증직 (贈職)을 더하였으니, 실로 이는 드문 일이었습 니다. 다른 경우 있거든 이는 전사(戰死)하였다 면 한번 정려를 내리는데 한 번도 은례(恩禮)를 입지 않은 것과 다른 뿐 부자(父子)의 쌍절(雙 節 ) 은 전 대 ( 前 代 ) 에 도 드 문 일 로 아 울 러 정 려 ( 旌 閭)하여 높이고 보답하는 땅을 만든다면 또한 시 행을 막을 수 없습니다.이로써 아뢰오니 은전(恩 典 ) 을 잇 는 일 을 감 히 마 음 대 로 할 수 없 사 오 니 전하께서 재가(裁可,임금의 결정)하심이 어떠하 옵니까? 강희(康熙)30년(숙종17,1691)10월 23일에 좌 승지 신 오시만 차지(次知, 각 궁방의 책임자)는 아뢰나이다. 회계(回啓, 임금의 하문에 대해 심의하여 상주 함)에따라시행하라하교(下敎)하시다. 주(註) 충효등록 - 1638년(인조 16)부터 1741 년(영조 17)까지 예조에서 충·효·열의 표창에 관 련된계목(啓目)을모은책 충신 의민공과 충장공의 충(忠)은 선조 판윤공 과 방계조인 충정공 휘 팽년(사육신) 등 선조의 삶과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효자집안에서 효자 나고 충신집안에서 충 신이난다는말과도일치한다. 최근 우리사회는 선조님의 아름다운 유훈이 전 해지는 뿌리 교육이 등한시되어 족보개념이 희박 해지고 이로 인해 청소년들의 인성과 국가관 그 리고 충효(忠孝) 정신마저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민공과 충장공 부자의 삶이 재조명되 어 청소년들의 인성함양에 크게 도움이 되길 소 망해본다. /참고문헌 순천박씨 판윤공파 선영록, 조선왕 조실록,충효등록 /글 정리·사진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 anmail.net) 충신(忠臣) 박이현·박영서부자(父子 ) 선조 유지를찾아븣 충신문(忠臣門)과선원세계(璿源世系) 충신문-경북성주군수륜면수륜리477.경북문화재자료제502호 쌍충신문-충남 논산시 광석면 왕전 리(마두마을). 후손들이 성주에서 논산으로 이주하면서 건립되었다. 마두마을전경-충장공의며느님영인안동권씨께서아들(휘수진)을데리고경북성주에서친정고을강경으로가다세거지 를정한곳이다. 충신의민공(毅愍公)박이현(朴而絢) 박이현정려편액 충신충장공((忠壯公)박영서(朴永緖) 박영서정려편액 실록으로본충신(忠臣)부자(父子)사실 의민공시호교지건륭7년(영조18,1742) 충장공시호교지건륭7년(영조18,1742) 충효등록(忠孝謄錄) 양세숭모비(논산마두마을)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