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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를 즐기며 총과 활을 만들어 무예를 익히기를 좋아했다. 성장함에 따라 용력이 뛰어나서 비호장군의 칭호를 받았고 활과 총은 백발백중의 묘기를 터득했다. 1904년 전화과에 출사하여 판임관이 되고 동년 8월에 통훈대부 의금부도사에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을사협약이 체결됨을 보고 공이 분한을 이지지 못하여 대장부가 국가위망에 처하여 어찌 일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리오. 오직 원수를 처부시어 국은에 보답할 뿐이다. 곧 동지를 규합하여 거의를 꾀하던 중 마침 동광 정환직 선생이 고종제의 밀칙을 받들어 영남에서 기의하게 되자 남석우 남석인 이인기 등 제공과 함께 용○ 참가하여 단오공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산남의진을 결성하였으나 병기의 부족함을 통탄한 공은 탄환의 제조공급을 친히 담당하여 험한 산길과 범람하는 홍수를 몇차례나 건너 보급에 전력하고 이어서 선봉장으로 팔공선현 대사산 등지에 전전하여 임기응변의 기습으로 수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개미때처럼 몰려드는 적세는 날로 성해갈 뿐 마침내 1907년 가을 단오공이 전몰하고 동광 선생이 대장에 취임하자 공이 주야로 장영을 보위하여 기무에 참여하였고 선생께서 또 순절하심에 항전지구를 분담하여 공은 청송을 담당하였다. 1910년 마침내 종사가 구허되니 풍찬노숙의 기구한 신세마저 발붙일 곳 없으나 남은 장정을 격려하는 한편 신돌석 부대와도 연결하여 퇴세만회에 힘쓰다가 고와곡 싸음에 적의 추격을 받아 경주 김씨댁 내실에 잠입하였는데 유여사의 기지로 벽장에 숨게 되고 뒤따라온 적을 감쪽같이 속여 위기를 면하게 되자 여사의 높은 의협심에 깊이 감사하여 의남매를 맺어 평생을 존경했다. 이에 뒷산으로 탈출하여 적 45명을 사살했으나 공 또한 중상을 입어 산곡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혹독한 형초로 병발의 몸되어 더욱 울분을 못이겨 일절의 세념을 끊고 초야에 숨어 말없는 항쟁을 계속하던 중 마침내 광복의 날을 맞았으나 뒤따라 일어난 6.25의 참극에 새로운 비분을 품은채 1952년 정월 13일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시다. 그 후 28년 기미에 공의 아들 심직이 기념비를 새우기 위해 나에게 비명을 청하니 공의 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