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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남면 구천리 911-3 애국지사 산남의진 선봉장 배연집 의사 기념비를 찾아왔다.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이어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 되어갔다. 배연집은 이와 같은 민족적 위기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이때 정용기(鄭鏞基)가 귀향하여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의진 구성을 진척시켜 가고 있었다. 정용기는 시종관으로 황제의 측근에서 종사하고 있던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의 아들로서 부친은 황제의 밀명을 받고 아들을 시켜 의거를 일으키게 하고 부친은 서울에서 지원하기로 약속 받은 때문이다. 정용기는 지기지우(知己之友)인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영남 일대의 크고 작은 모든 고을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대규모의 의진을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영천·신녕·흥해·청하·기계·죽장·영덕·영해·영일·장기·진보·청송·영양·봉화·예안·안동·비안 등지를 포괄하는 이른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배연집은 정용기의 산남의진에 입대하여 박태종(朴泰宗)과 함께 비안(比安)·의성(宜城) 일대에서 거의하여 의병을 소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곧 배연집은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소모하여 무장시키고 정용기의 의진에 달려갔다.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깃발을 높이 들고 영천을 떠나 영해로 진출하여 신돌석 의진과 합진하여 적과 교전 끝에 큰 전과를 올렸다. 그후 청하(淸河)로 진격하던 중 적의 격장지계에 넘어가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배연집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