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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 그들을 위해서 나으니까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제천(堤川)의 폐허 우리 일행은 매일 타버린 마을과 황폐한 도시와 버려진 시골을 계속 여행해 나아갔다. 들판은 풍요한 농작물로 가득했는데, 언제라도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 침 략자들도 망쳐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의 대부분은 근처 산기슭에서 내려오 기를 두려워하고 그대로 숨어 있었다. 소수의 용감한 농부들은 부락으로 내려와서 추운 겨울이 닥치기 전에 지낼 임시 거처를 만들기에 바빠서 수확은 나중으로 미루고 있었다. 새 떼들이 마음껏 농작물을 포식하고 있었다. 충주로 가는 도로 연변의 마을 중 태반이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어 있었다. 충주에서 나 는 산길을 타고 하룻길 정도의 제천을 향해 갔다. 이 두 도시를 연결하는 간선 도로변에 있는 촌락들의 8할이 완전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잿더미로 변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언제나 의병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부정 했다. 싸움에 참가한 적이 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지원군들이 산에서 내려와 일본인을 공 격했는데, 그 일본인은 그 지방 사람들을 처벌함으로써 보복 행위로 나왔다는 것이다. 마 을 사람들에게는 무기가 없다는 것과 조용히 집을 다시 짓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하는 말이 그 당시에는 거짓이 아닌 듯 보였다. 나중에 내가 한국의 의병들을 만 났을 때에 이 말이 진실이라는 확증을 얻었다. 의병들은 대개가 그 고장 사람들이 아니라 서울에서 온 도시 사람들이었다. 이 조그마한 지역에서만도 1~2만의 주민들이 집을 파괴당했거나 일본군의 행패가 무서 워 산속으로 도망쳤었다. 이천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한 가옥의 지붕 위에 적십자기(赤十字旗)가 나부끼고 있는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집은 그 지방에 있는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한 교회당 이었다. 나중에 나는 적십자기가 많은 가옥의 지붕 위에 달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이 유인즉 이러한 방법으로 기독교의 하느님에게 호소함으로써 세계의 기독교 국가들의 동정 과 자비심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시골 여관에서 여장을 풀자 그날 저녁에 조용한 목소리의 근엄하게 생긴 중년의 2 장로가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풀이 좀 꺾여 있었다. 자기네 마을이 굉장한 피해를 입었 다고 말했다. 마을을 통과하는 일본 군인들이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난폭한 행패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채소상의 아내가 동료 군인이 총검으로 망을 보고 있는 가운데 일본 군인 에게 능욕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내의 비명 소리에 놀란 한 소년이 달려가 그녀의 남편을 데려왔다. 그는 손에 칼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