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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정월 12일. 중군장 李春永이 군사를 이끌고 수안보의 왜적을 토벌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 사하였다. 좌익장 이건영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회군하여 성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이춘영 의 忠義心과 용감한 뜻이 비록 애석하기는 하나 가히 죽을 곳에서 죽었으니 모두가 고인 을 흠모하였다. 정월 13일 중군 이춘영의 상여를 지평의 본가로 운구하였다. 제천에 사는 전 三和府使 李貞器로 하여금 일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런데 충주읍의 병사들이 아직도 나오지 않는 가운데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고 있는 왜병들이 여러 차례 氷峴 고개에 올라서서 성을 향해 발포하였다. 성은 낮고 적이 있는 산은 높아 성을 순찰하기가 불편하여 민병으로 하 여금 女城을 다시 쌓아 수리하게 하여 며칠 만에 완성되었다. 이날 밤에 베개를 베고 잠 시 눈을 붙였는데 옆에 자고 있던 사람이 호롱불을 엎어버려 나의 왼쪽 귀에 석유가 들어 갔다. 정월 18일. 서상열을 차출하여 소모대장으로 삼고 한 부대를 이끌고 영남으로 파견하였 다. 정월 19일. 새벽에 왜적 100여 명이 빙현 고개에 올라서서 성을 향해 크게 총을 쏘니 그 형세가 성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또 사다리를 만들어 성벽을 넘어오려 하니 아군이 성 벽에 숨어 있다가 성에 가까이 접근하면 발포하였다. 이에 왜병들이 총탄에 맞아 죽은 자 가 많았다. 제천에 사는 朱庸奎는 司客所에서 大將所로 오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의병을 함께 한 情과 원통한 마음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왜적이 또 만리동 고개에서 校村으로 들어와 대성전에 불을 지르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닿았다. 즉시 대장소로 가 서 이 사실을 알리니 유생 수백 명으로 하여금 불을 끄게 하였다. 그러나 正殿은 이미 다 탔고 다행히 東西의 건물이 타지 않아 위패를 동헌 빈청에다 모셨다. 정월 20일. 朱庸奎의 장례를 치렀다. 시신을 본가로 돌려보냈다. 오후에 선봉 김백선이 포군 100여 명을 인솔하고 지평에서 돌아왔다. 21일 미명에 만리동 고개 쪽에서 포성이 크게 들렸다. 해가 뜰 무렵에 왜적이 사방에서 성을 포위하고 우리의 군량과 장작을 나르는 길을 끓어 우리의 持久戰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충주에서 이진할 계책을 의논하니 중론이 하나같지 않았다. 혹은 충주 밖 의 西村으로 나가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혹은 內西郡으로 물러나 그곳에서 머물자는 의 견이 있었다. 이에 대장은 중론에 따라 충주읍의 동문을 열고 나아가 發峙 고개를 넘어 新塘店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유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