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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여러 장수와 보좌관들이 모두, 교헌이 장령(將令)도 없이 이런 망령된 행동을 하였으니 참 형(斬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원도상(元道常)이 사사로이 원용정(元容正)에게 하는 말이 “교헌이 망령된 행동은 했지만 그가 어찌 그런 내용까지를 알았겠는가. 오직 민영기가 개 화당인 줄만 알고 잡은 것인데, 만일 이것으로 해서 참형을 당한다면 군중에서 모두들 개 화당에게 머리를 움츠릴 것이니, 이것도 크게 옛것을 바로잡고 개화를 억제하는 의리를 상 실하는 일이다.” 고 하니, 용정이 “그렇다.” 고 하며, 힘써 선생께 고하고, 또 민영기에게 말하여 풀어 주게 해서 석방되었다.[‘여러 장 수와 보좌관들이’에서부터 여기까지는 서암의 말임.] ○ 서(徐) 소모장(召募將)이 단양 땅 사인암(舍人岩)으로 물러나와 주둔하였다. 경암(敬庵)이 이남규(李南珪)에게 눌려서 담담하게 지내다가, 이때에 사람을 보내어 소식 을 통하므로 이규영(李奎永)을 시켜 회답하였다. ○ 9일(양력 5월 21일;편자 주) 서소모장이 보낸 죄인 류난형(柳蘭馨)이 석방되어 나갔다. 난형은 류서애(柳西崖)의 후손으로, 안동 고을에서 이름난 집안이었다. 안동 병진의 부장 (副將)이 되어 경암과 같이 일하였는데, 속으로 안동 관찰사 이남규에게 붙어 적을 끌어다 서소모장을 해치려 하다가 경암에게 발각되었다. 그래서 본진으로 잡아 보내어 장차 가형 하게 되었는데, 대장소의 종사(從事) 홍승학(洪承學)의 간교한 꾀로 석방시키게 하였다. 10일(양력 5월 22일;편자 주), 경암이 단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경암은 그 동안 혼자서 남쪽 지방의 일을 맡아 온갖 근고(勤苦)를 겪었으며, 또 일이 잘 진척되어 매 우 볼 만하기도 하였는데, 나중에는 이남규에게 패하고 류난형에게 속아서 두 번째 가서도 성공을 못했다. 11일(양력 5월 23일;편자 주), 우군장(右軍將) 원규상(元奎常)을 교체하고 이강년(李康䄵) 으로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대신하게 하였다. 윤성호(尹聖鎬)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성호가 흥원창(興元倉)에서 참장(參將) 한동직(韓 東直)을 따라서 장호원·가흥(佳興) 부근으로 나갔는데, 군사가 적어서 싸움을 구경하며 성 원(聲援)만 하다가 돌아왔다. ○ 장적(張賊 : 장기렴)이 황석촌(黃石村)에 들어왔다. 이때, 이강년이 마침 제천부(堤川府)로 들어왔는데, 선봉 손영국(孫永國)·총독(總督) 김사 정(金思鼎)·좌군장 이희두(李熙斗) 등이 적을 막아 싸우다가 사람을 보내서 급한 형편을 보 고하니, 강년이 이원하(李元厦)와 함께 밤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떠났다. 이 때 에 부내(府內)가 텅 비고 인심이 물 끓듯이 하므로, 공은 군사를 출동하여 남·북의 산성을 지키고, 전군(前軍)을 가리파(佳利坡)에서 불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