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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작고한 이장군 춘영(春永)의 조카 종덕(種德)이 와서 수일간 유하다 떠나는데, 공은 눈물 을 흘리고 만류하면서 일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였는데, 그 뜻이 격분하고 강개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선봉 김백선(金伯善)이 10초(哨)의 군사를 내달라고 청하였는데 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많은 군사를 장악(掌握)하여 자립(自立)하기만 힘쓰며, 군령에 위반되는 일이 많았음.] ○ 평창(平昌) 고을 이방이 담배·꿀·잣을 드렸는데 품의하고 받지 않았다.[이방은 이근숙 (李根肅)이다.] ○ 평창 고을 수성장(守城將)에게 글을 보내었다. 그 내용인즉, 흩어진 총기를 수습하여 보내고, 출전한 군사들이 가족을 구호하여 관사를 수리하고 파수(把守)를 거듭 엄하게 하라는 것들이다. ○ 명령하여 군중에 소용되는 시초(柴草)를 중군소(中軍所)에 바치게 하였다. 이때, 각 마을 백성들이 군중에서 불 땔 나무를 바치는데, 운시색리(運柴色吏)를 따로 임 명하여 그 일을 맡게 하였다. 그런데 군사 중에 욕심 많고 사나운 자들이 강제로 빼앗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 색리를 공갈하니, 금지 할 수가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시초를 중군소 에 들여다 쌓고, 욕심대로 가져가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게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군중에 시초가 남아돌아가게 되고, 백성은 공급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것을 그만 두 라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이것이 사소한 일이지만 사실은 민력(民力)에 관계된다. 저 난리를 치른 백성들이 지금 농사 지을 봄철을 당하여 또 시초 공급에 곤하게 되니, 사람들이 탄식을 하게 되는데, 그 사정을 돌보지 않고 함부로 허비하고 그저 바치라고만 독촉을 한다면 될 일이냐.” 라고 하였다. 문하생 가운데 연소한 이가 와서 뵈니, 공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불행한 때를 만나서 학문에 전심하지지 못하게 되니 한탄스럽다.” 라고 하였다. 이병회(李秉會)가 평창에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적당으로 지목된 원 엄문환(嚴文煥)은 이미 이원하(李元厦)에게 잡혔다.” 라고 하였다. ○ 9일(양력 3월22일;편자 주)에 군수품을 충주의 여러 진으로 보냈다. ○ 포군(砲軍) 권선경(權善卿)이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는데, 대장소에서 특례로 놓아 주었다. 선경은 공의 고향 사람인데 예전 친분만 믿고 방자하며, 군량을 배정하는데 분쟁 을 일으켜 불손하게 굴므로, 포박하여 참형하려 하는데 대장소로부터 용서하여 주었다. ○ 남루(南樓)에 올라 크게 사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