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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先賢)을 모욕하는 것을 장기(長技)로 삼았는데,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서 인재를 뽑게 되자 자청하여 그 손자를 보냈다. 그 손자가 을미년 겨울에 집에 와 머물다가 다시 서울로 떠났 는데, 30리 밖을 가서 서울에 삭발령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서 돌아와 그 할아비를 보고 그 소식을 말하니, 휘두(輝斗)는 지팡이로 그 손자를 때리며 겁이 많다고 그 나약을 책하 였다. 그리고 날이 저물었는데도 유숙하지 못하게 하고 바로 몰아냈던 것이다. 이런 심장 을 지닌 자를 누가 혹시 보았는가. 이 두 놈의 행위만이 이럴 뿐 아니라, 거의가 외국을 과장하고, 옛 것을 업신여기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곧 시운(時運)인데 어찌 반드시 옛 것 만 지키라 하는가.” 하니 온 고을 사람들이 많이 눈을 흘겼다.] ○ 임신일(6일, 양력 1896년 1월 20일;편자 주) 나누어서 제천으로 돌아왔다. 공이 원주에 있을 때, 박운서(朴雲瑞)를 시켜 군사를 점고하여 뒤따라 제천으로 오게 하 고 곧 떠났는데, 운서가 기일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그제야 허술하게 처사한 것을 후회하 였다. 비록 하루아침에 1백 고을을 돌아다녀도 실용에는 보탬이 없을 것이므로, 제천의 일마저 그렇게 될까 염려하여 드디어 제천으로 돌아와 친히 군사를 모집해서 몸소 거느리고서야 떠나려 하였다. 이때에 많은 군사와 여러 선비들은 다 단양에 머물러 있고, 공 혼자서 군 무를 맡아보며 밤이나 낮이나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때 경보(警報)가 바야흐로 들어오니 공은 한편으로 군사를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공격과 수비에 대한 계획을 하는데, 충분(忠 憤)이 격동되어 언어와 안색이 매우 비장하니 사람들이 다투어 따라붙었다.] ○ 갑술일(8일, 양력 1896년 1월 22일;편자 주)에 군사 서상렬, 중군 이춘영 등이 단양 장회협(長滙峽)에서 적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때 네 고을(지평·원주·제천·단양) 의병의 소문이 매우 널리 퍼지니 적이 공주에서 곧장 단양으로 들어왔다. 또, 청풍군수(淸風郡守)[청풍부사였음.] 서상기(徐相耆)가 관찰사 김규 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머리를 깎았는데[상기는 본시 선비로 이름이 있었음.]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여 규식에게 가서 의지하였다가 이때 적에 섞여 함 께 돌아왔다. 이날 새벽에 장회촌(長滙村) 이장이 급히 달려와 적이 쳐들어온다고 하므로 단양읍이 몹시 협착한 때문에 이필희는 군사를 나누어 장림(長林)[서북쪽 두어 마장 되는 곳.]으로 진지를 옮기고, 이범직(李範稷)은 유교(楡橋)를 파수(把守)하였다. [남쪽 7리 되는 곳임. 범직은 완산인(完山人)인데, 자는 보경(輔卿)이요 성재의 제자다. 체격이 자그마한데 기운이 정예하고 학문에 힘쓰며 의를 좋아하였다. 갑오년 여름에 강원감사(江原監司) 민형 식(閔亨植)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공은 의당 나라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할 처지이거늘 지금 적병이 가득 차서 며칠 안에 변이 일어날 모양인데 어찌하여 미리 계획을 하지 않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