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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53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그날밤 관군의 방화로 안동부가 불탔으므로 중지 하고 말았다.82) 한편으로 주목되는 것은 안동부 관할의 의진은 송천도회松川都會와 풍 산회의 豊山會議를 추진하여 연합을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청송의진은 4월 12일(음 2.30) 송천도회소에 유생 장한탁을 파송하였다.83) 송천도회는 안 동부 관할 의진이 안동의진을 중심으로 관찰사 이남규의 도임을 받아들 이는 가부를 결정하려는 회의였다. 풍산회의는 5월 20일(음 4.8) 열읍 의 병들이 풍산장터에 모여 삽혈동맹揷血同盟하기 위해 추진되었다.84) 그러 나 청송의진은 감은리전투 이후 전력의 소모와 영덕출진소의 출병 등으 로 풍산회의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다. 의성의진과는 전후 3‧4차의 사통을 주고받았으나, 청송의진에서는 의성‧ 대구 등지로 척후병을 파송하여 대구 관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주력하 였다. 대구 관군은 군위‧의성을 거쳐 안동부 공략에 그 목표를 두고 있었 다. 4월 2일(음 2.20) 새벽 대구 관군은 의성읍을 불태우고 안동부를 공략 하기 위해 북상하였다.85) 이때 의성읍은 공해와 민가가 모두 불타 약 800 여 호 중 남은 것은 100여 호에 불과하였다.86) 청송의진은 주로 의성의진과 대구 관군의 움직임에 대처하여 서로 협력하고 있던 중 5월 13일(음 4.1) 연합의진을 결성하였고, 5월 14일(음 4.2)에는 감은리전투를 수행하였다. 경주지역과 청송의진은 창의 초기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다. 3월 29일 (음 2.16) 경주유생 손최수 孫最秀‧손최오孫最五 두 사람이 청송의진을 방문 하여 경주에서 소모하여 경주지역에서 의기가 고무되도록 요청하였으며,87) 82)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21일자. 83)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30일자. 84)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초8일자. 85)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20일자. 86)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25일자. 87)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