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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이 자료에서 볼 수 있는 문배전은 각 문중에 배당된 것이다. 대체로 마 을을 단위로 형성된 동성마을이 공동으로 부담하고 있는 원천적인 징수 였다. 반면, 차출금은 의병들이 지주‧부호층에 대하여 군수금 명목으로 반강제적으로 징수하는 자금이었다. 그리고 의연금은 창의에 앞장서거나 동조하고 있던 양반유생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이었다. 청송의진에 있어서 군수금의 모집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요호에 대 한 차출금이었다. 1896년 4월 6일 지휘부는 요호들로부터 차출금 1만萬 90여민餘緡을 거둬들이는데, 많은 요호들이 차출금의 강징에 반발하여 납 부를 미루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중 덕천리 심호택의 경우를 보자. 上營에서 沈琥澤의 饒錢이 너무 많아 미안하다 느껴 감해주자는 지경에 이 르렀다. 향중 회원들이 모두 속히 진영에 들어 온 즉 명륜당에 출좌하여 鄕 員 및 각 營이 향교에 들어와 힐난하여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대개 沈琥澤은 향내의 제일 부자이며, 대장은 저의 문중 어른인데도 도리로 보아 노력과 성의를 다해서 上等으로 납부하여 다른 사람보다 뒤져서는 아니 될 것이거 늘 지체하여 시일을 끌고 있으니 다만 그 재물만 알고 아깝게 생각하여 營 中의 실착이 저 때문에 일어난 줄 모르니 통탄스럽고 해괴한 일이다.69) 심호택은 청송군 향회의 회원으로 소위 ‘호박골 심부자沈富者’였으나, 같 은 마을의 심씨일문이 창의에 앞장서고 있는 상황에서 차출금 납부를 지 체하여 비난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청송의진의 활동 (가) 주변의진과의 관계 청송의진은 창의후 주변의 안동‧선성‧진보‧영양‧의성‧영주‧영덕의진에서 69)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