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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이와 같이 양반유생들은 의진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포병을 소모하였 으나, 포병들은 일정한 대가나 이익에 따라 참여하고 있었다. 청송의진은 급료 문제로 일부 포병의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대체로 포병은 100여 명으로 대오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 병사층에는 보부상이 일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부상의 의병 참여는 안동‧제천‧홍주‧이천의진54) 등에서도 보이지만, 청송의진에서 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즉 청송의진은 수시로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 군사훈련을 담당한 교련관敎練官이 보부상 출신이었 음을 다음 자료가 짐작케 해 준다. 초 8일 砲丁을 點考하고 陣法을 익히다. 이씨 성을 가진 자가 말하기를 “소인이 스스로를 감히 추천하는 것은 常山의 陣法을 약간 알고 있기 때 문이다”하기에 前導하여 지휘토록 시켜보니 進退와 旋回의 首尾가 가히 볼만하였다. 그 사람에게 물어 본 즉, 본시 성 밑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아이 때부터 行商을 다니며 서울과 지방에서 군대 행사를 많이 구경하였 다고 한다.55) 위의 자료에서 ‘행상’을 다녔다는 것은 보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지휘 능력과 “서울과 지방에서 군대 행사를 많이 구 경하였다”고 하는 것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던 인물일 가능성 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양반유생들이 주도하는 청송의진에서 그 주류를 형성한 계층은 많은 수의 일반 농민들이었다. 유생 의진의 특성상 포병이나 보부상들이 전투 54)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17일자; 元容正, 「義庵柳先生西行大略」, 獨立運動史資料集 1, 525쪽; 安昌植, 艮湖日記 , 1895년 11월 28일자;《東京朝 日新聞》, 1896년 3월 17일자, ‘전보’(金祥起, 甲午‧乙未義兵 硏究 , 일조각, 1990, 108쪽) 등 참조. 55)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음 2월 초8일자; 여기서 이씨성을 가진 자는 金河洛의 陣中日記 에 의하면 李敎植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