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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45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 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 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 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60. 윤효업尹孝業 : 1849. 8. 22~1901. 6. 25.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 을 전개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 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 송향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 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 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윤 효업은 이때 서기로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 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윤효업은 좌익장 권성하 등과 함께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청송의진은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61. 이기순李琦淳(이명; 明秀) : 1918. 3. 19~ .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 재학 중 1941년 4월 동지들과 함께 3인조 및 9인조의 독립결사대를 조직하고 항일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동포마을인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