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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 청송의 독립운동사 南義陣이 조직되고 대장으로 정용기鄭鏞基가 추대되자, 입진하여 지례知 禮·고령高靈을 담당하였다. 이후 윤기열은 이초장二哨長이 되었다가 도포 장都暑將으로 직책을 옮겼다. 또한 그는 1907년 이세기李世紀와 함께 장서읍을 습격하였을 뿐만 아니 라, 분파소分派所·세무서·우체소·서기청書記廳 등을 방화·소각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삼이태랑森伊太郞을 사살하였고, 1909년에는 산남의진의 각 부대를 각지로 분파하여 큰 산을 점령하고 유격전을 전개하는데,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倡義誌 下卷 57쪽, 山南義陣遺史 168·258쪽,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第1卷 352쪽. 56. 윤삼업尹三業(이명; 殷道) : 1875. 7. 13~1953. 10. 29. 청송의진에 참여 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 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 이 전해지자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 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 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선임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 다. 윤삼업은 이와 같은 의진편성 당시 통인通引으로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 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 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활 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