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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91 조아와의 결별’과 ‘일국일당제一國一黨制’라는 두 가지 원칙을 포함하였다. 그렇다면 코민테른이 망명지에서 활동하던 한인사회주의자들에게 ‘1국 1당 원칙’을 요구한 근본 의도가 중국에서 활약하던 혁명 조직을 해체하 고 중국 혁명 조직에 가담하라는 것이기도 하고, 그 반면에 “조선 혁명 운동에 참가하려면 북간도에 머물지 말고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이 퍼져 있는 국내로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북간도를 혁명운동의 전통적인 근거지로 간주해오던 조선인 망명자들에게는 가혹한 조처였다.”177) ‘12월 테제’를 접한 이동휘‧김규열은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고, 그 결 의에 근거하여 파벌을 일소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 였다. 여기에 윤자영을 비롯한 김철수‧오산세吳祘世‧안상훈安相勳 등 이동 휘계열의 인물이 규합하였다. 다만 국내에는 경계가 엄중하여 목적 달성 이 어렵기 때문에, 우선 국내와 연결이 쉬운 길림성 방면으로 근거지를 옮겨 재건설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발걸음은 국내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두어졌음은 당연하다. 1929년 2월 하순 경에 윤자영은 동지들과 더불어 길림성 돈화현敦化 縣으로 이동하였다. 3월 하순에 돈화현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조선공산 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주요인물과 직책은 다음과 같다. ◦책 임 : 金錣洙 ◦조 직 부 : 尹滋瑛 ◦선 전 부 : 金榮萬 ◦연 락 부 : 金圭烈 ◦경 리 부 : 崔東旭 ◦정 치 부 : 金泳植 ◦공 청 부 : 吳祘世 178) 177) 임경석,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진보평론》제3호, 현장에서 미래를, 2000, 315-316쪽. 178)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 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