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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1920~40년대의 독립운동 / 2 79 경으로 철수한 것이다.151) 당시 이동휘가 내세운 논리는 ‘선공산당 건설‧후 민족당 건설’이었다.152) 즉 먼저 꼬르뷰로가 먼저 공산당을 조직하는 데 주력하고, 이후에 민족당 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국민위원회가 민족적 혁 명당 건설을 우선하는 원칙으로 강조하고 나서자, 이동휘와 정재달 등은 전위당 건설을 우선하자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153) 여기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볼 부분은 통일전선체로서의 민족당을 전위당이 아닌 고려공산당 이 결성된 후에 조직한다는 점이다.154) 그것도 전위당의 건설은 만주나 연해주와 같은 국외지역이 아니라, 국내라야 한다는 당위성이 제기되었 다. 다음 해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는 것도 이러한 방향제시와 추 진에 따른 결과인 셈이다. 윤자영이 한인청년들을 결집시키고 나선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상해지역에서 활동하던 그가 블라디보스톡의 동정을 지켜보 면서, 다시금 전위당 결성의 전 단계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주도 자들은 “민족적 일치단합 아래에 동포청년은 대동단결하여 희생적 정신 으로 사업에 당하면 반드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청년동맹회를 발의하였다.155) 당일 선출된 집행위원은 신국권申國權‧조덕 151) 張錫興, 「1920년대 중기 민족적 혁명당 형태의 계획과 통일전선구도」, 民族 統一戰線的形成與韓中抗日鬪爭 (2004. 4. 19,북경대학동북아연구소‧연변대학민족연 구‧한국근현대사학회), 54쪽. 1924년 9월 3일에 임시정부 이동녕 명의로 발표된 「독립당대표소집간장」은 창조파의 행보에 대한 대응책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152) 반병률, 誠齋 李東輝 일대기 , 범우사, 1998, 391-392쪽. 153) 張錫興, 「1920년대 중기 민족적 혁명당 형태의 계획과 통일전선구도」, 民族 統一戰線的形成與韓中抗日鬪爭 (2004. 4. 19, 북경대학동북아연구소‧연변대학 민족연구‧한국근현대사학회), 55쪽. 154) 申春植, 「組織主體를 중심으로 본 ‘朝鮮共産黨’ 創建過程」,《成大史林》8, 성균 관대학교사학회, 1992, 63-65쪽. 155)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5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