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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 청송의 독립운동사 2) 김지섭 의거 지원과 상해청년동맹회 조직 (가) 김지섭 의거 지원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뒤에, 윤자영은 상해에서 자리를 잡고 활약하였다. 우선 확인되는 사실은 그가 임시정부에 잠시 참가했다는 점이다. 7월 2일 에 그가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이 되어 ‘임시헌법개정기초위원’으로 발 령이 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144) 윤자영은 의열단의 김지섭金祉燮이 동경으로 잠입할 때 그를 도왔다.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관동대진 재’에서 수천 명의 한인들이 무참하게 살해되자, 의열 단에서는 이를 응징하는 의열투쟁을 계획하였고, 이에 결연히 나선 인물이 안동출신 김지섭이었다. 그런데 그를 일본으로 밀항시키는 일에 윤자영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것이다. 이 사실은 1924년 1월 6일에 김지섭 의 ‘이중교 二重橋 투탄의거’가 일어난 직후에 중간 선편을 알선해준 일본인 사회주의자 수도광이秀島廣二가 일제경 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알려지게 되었 다. 편산잠片山潛 계열의 인물인 그는 1922년 치타에 머물 당시에 윤자영을 만난 일이 있었고,145) 그곳에서 두 파로 나뉜 고려공산당의 반목을 해결하 기 위해 ‘민중신문’을 발행하는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923년 144)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322‧543쪽. 145)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461쪽. <김 지 섭> < 이중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