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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219 로 선구자격인 김재봉金在鳳이나 이준태李準泰가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專 習所를 다녔는데, 그도 바로 이 경성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를 다녔다고 전해지고 있다.79) 그런데 도저히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중단하고 다 시 학업의 길을 찾은 것이 곧 경성전수학교였다는 것이 집안의 이야기다. 그가 경성전수학교를 다녔다는 기록은 정확하다. 3‧1운동 당시 경성전수 학교 담당 연락대표로 등장하고, 이로 말미암아 검거되어 재판을 받은 판 결문에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일단 그가 경성전수학교 1학년 과정을 다닌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경성전수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해방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연결 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청송과 같은 산골에서는 그를 가히 ‘천재’라거나 ‘신동’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는 활동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0년대 청년운동과 고려공산당 활동기간에는 소야蘇野, 혹은 소야笑也라는 호를 즐겨 사용했 다.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기관지로 발간한 아성我聲 에 ‘소야’라는 이름으 로 시조‧시‧논단 등을 발표하였고, 1924년 상해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일 제경찰의 정보문건에도 역시 윤소야尹蘇野(자영滋瑛)이라는 이름으로 소개 되어 있다.80) 또 같은 시기의 일제자료는 그의 별명을 윤석한尹石(석錫) 漢, 호를 불가살不可殺이라고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81) 그리고 1932년에 모스크바의 국제레닌정치학교로 유학하고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청 원서를 제출할 때 첨부한 것으로 보이는 「이력서」에는 이름을 ‘정일영丁 79) 경성공업전습소는 염직과‧도기과‧금공과‧목공과‧응용화학과‧토목과 등 6개 과로 구성되다가, 1910년에 토목과가 없어졌다. 이 학교는 서울 이화동에 있던 것으로 경성공업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제국대학 공대를 거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변하게 된다(김희곤‧강윤정, 잊혀진 사회주의 운동가 이준태 , 국학자료원, 2003, 30쪽). 80)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504쪽. 81)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5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