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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215 참여하고 귀향한 유림들도 없었다. 이들 주도 인물들은 평소 독립에 대 한 강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주변의 독립운동소식에 크게 고무 되어 민족문제 해결의 기회로 여긴 듯하다. 다만 진보시위를 주도한 권 태원은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영덕에서 이미 듣고 그곳 시위를 주도 한 후 진보에 왔기 때문에 현서(화목)시위 주도인물들과는 다소 차이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 만세주도 인물들은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시위를 일으켰음이 드러난다. 민족자결주의란 본질적으로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하는 논리로써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고, 독립만세운동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청 송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민족자결주의의 내막을 알든 모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상황을 독립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만은 헤아릴 수 있다. 이들 주도인물들은 독립쟁취 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으며 실제로 독립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음이 판결문에 나타난다. 넷째, 25일의 진보시위는 외지인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영덕시 위를 주도한 구세군 참위 권태원이 진보 이촌교회로 몸을 피해 그곳에 서 다시 교인들을 이끌고 진보 장터로 나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는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4년 전부터 이촌교회 안에 설립된 교육기관에 초 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인적기반을 구축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어렵 지 않게 독립운동의 장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진보시위는 종교조직을 통 해 만세시위가 확산된 사례로 생각된다. 이후 이촌교회는 만세시위로 말미암아 동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선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정위 박근실朴根實은 결국 타지로 전임을 상신하게 되었다.75) 7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집, 973-9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