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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서상철의 포고문은 7월 14일 예안의 이만도李晩燾에게 도착하였다. 7월 20일 서상철은 이만도를 만나기 위해 예안으로 왔다. 서상철을 만난 이만 도는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왕의 공식적인 명령 없이 군 사를 모집하여 거병한다는 데 약간 주저하였다. 7월 25일 서상철이 발의한 안동향교에서의 거사는 안동부 수령의 저지 로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서상철은 계속 군사를 모집하여 8월 초 안동 일 대에서 2천여 명의 대규모 의진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7) 서상철의 안동의병은 상주 함창의 태봉을 공격하였다. 이곳은 대구와 충주‧서울을 잇는 병참선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서상철은 우선 다케 우찌竹內를 체포하여 처단하고 600여 명의 의병을 동원해 태봉에서 일본 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서상철은 패배하고 청풍방면으 로 후퇴하고 말았다. 안동의 갑오의병은 안동 유생이 아닌 다른 지역의 유생에 의해 발의되 었지만, 영남유림의 본거지인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부지역이 적 극 지지하고 참여한 투쟁이라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2. 을미의병 19세기 후반 경상도 지역의 양반유생들은 1881년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를 통해 ‘척왜양일체론斥倭洋一體論’을 전개하였고, 1884년의 변복령變服令 을 통해서 정부의 개화정책을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바탕위에 유생들 은 1894년의 갑오변란과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弑害‧변복령‧단발령斷髮 令 등을 계기로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개화파 관료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7) 「東學黨에 關한 件」 第177號, <慶尙道東匪에 關한 公翰>, 駐韓日本公使館記錄 , 國史編纂委員會, 1986; 金允植, 「錦營內札」, 東學亂記錄 上, 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