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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189 제2절 청송지역의 3‧1운동과 특성 1. 청송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시위 양상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같은 날 평양 ‧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에서도 전개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경의선京 義線과 경원선京元線의 철도 연변에 위치하고 있어 연락이 쉽다는 지리적 특성 외에도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인사들의 출신지라는 특성을 가지 고 있다.31) 3월 1일에 이어 독립만세운동은 함경북도에서 제주도까지 전 국 방방곡곡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32)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3월 6일 서간도 환인현에서 7,200명의 동포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주 ‧연해주‧미주‧중국 등지의 동포들도 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독립선언식과 시위행진을 벌였다.33) 3‧1운동이 지방으로 파급되는 과정은 대체로 네 가지로 나타난다. 천도 교나 기독교 등 종교단체의 조직을 통한 것이 첫 번째이고, 고종 황제의 국상34)에 참여했던 지방 유림들의 귀향으로 인한 것이 그 다음이라면 셋 째는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의 학생들이 그곳에서 시위를 벌인 후 고향으 31) 金鎭鳳, 三‧一運動史硏究 , 國學資料院, 2000, 54-55쪽. 32) 3‧1운동은 의병전쟁과 반대로 전파 방향이 서울을 비롯해서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도‧ 황해도 등 북부지방에서 먼저 일어나 이후 차차 남쪽으로 파급 되어 갔다. 그리고 시위운동의 절정기는 3월 20일 이후부터 4월 10일까지 이다(朴成壽, 獨立運動史硏究 , 創作과 批評社, 1980, 303쪽). 33) 신용하, 「3‧1독립운동의 발발의 경위」, 일제 강점기하의 사회와 사상 , 신원문 화사, 1991, 82쪽. 34) 당시 유림들은 고종 황제의 국상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상경하는 것이 관례 에 속하는 일이었는데, 문중과 마을을 대표하여 국상에 참여한 유림들은 반일 감정을 더욱 노골적으로 선명하게 표출시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 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국장 전날까지 전국에서 望哭의 누계는 230개소이고, 상경한 유림의 수는 약 4,400명이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제6집, 481쪽의 내용으로 ‘朝鮮憲兵隊司令部’의 기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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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청송지역의 3.1운동과 특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