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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1910년대의 독립운동 / 167 지역 재지사림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분상으로 향교 출입이 빈번하였 을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왜 진보향교에 적을 두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청송 진보와 영양 입 암의 지리적 요인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영양에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영양향교 1곳 만 존재하였는데, 영양 중심부가 아닌 권영만의 출생지인 도계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즉 영양에서 삶의 터전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학문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양보다는 진보 가 더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진보향교를 출입하게 되었을 것이며, 이 후 이곳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입암이나 진보가 아닌 도계리에서 출생하였을까? 그 사실은 「제적등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가 바로 한양조씨漢陽趙 氏였기 때문이다. 권영만의 출생지는 조지훈趙芝薰의 고향으로 유명한 영양 주실마을과 함께 한양조씨의 대표적인 집성마을이다. 즉, 외가에 출생하 였으며 이후 본적지에서 생활하다가, 1922년경에 권씨(안동) 집성마을인 진보 광덕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며, 그것이 자의 自意인지 타 의他意인지도 밝혀지 지 않는다. 권영만이 이곳으로 이주할 때는 그가 군자금모집과 관 련된 사건으로 체포되 어 재판에 회부된 상 황이었기 때문에, 일 <권영만> <권영만 집터; 입암면 병곡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