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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에 해산 당하고 말았다. 1905년 5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가 결성되었는데, 보부상을 제외한 공 진회 관계자들이 혁신유림층과 결합한 것이다. 이 단체는 입헌군주제에 대한 논의를 벌였지만, 역시 일진회를 반대하는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 었다. 그러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 직후 해산되자, 그 주도세력은 1906년 4월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다. 1907년 7월 ‘정미조약’ 체결 직 후에 해산되기까지 대한자강회는 교육과 실업의 발전을 내세우고 전국적 으로 그 조직을 확대시키며, 기관지인《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를 발행하였다. 이 단체는 1907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로 재조직되었는데, 1908년 현재 지회가 60여 개로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한 협회는 그 지도부가 일진회와의 연합을 획책하는 등 그 성격이 모호하였 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자강회의 결성 이후 지방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주 축이 되어 학회가 설립되었다. 1906년 10월 평안도‧황해도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서우학회西友學會를, 11월에는 함경도 출신들이 한북흥학회漢 北興學會를 각각 결성하였다. 이 두 학회는 1908년 서북학회西北學會로 통합 되었다. 1907년에는 호남학회와 호서학회가, 1908년에는 기호흥학회‧관 동학회‧교남학회 등이 조직되었다. 지방별로 조직된 이들 학회는 군 단 위로 지회를 두었고, 많은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일본유학생들도 태 극회나 낙동친목회 등 출신지역별로 학회를 조직하였고, 이에 대한유학생 회‧대한학회‧대한흥학회와 같이 통합유학생단체들도 결성되었다. 이러한 정치‧사회단체, 계몽단체들의 국민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이 활발해지 자, 일제는 1908년 8월 ‘학회령’을 공포하여 학회가 정치에 관여할 수 없 도록 만들었다. 이 사실은 학회의 주요활동이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이었지만, 정치활동도 매우 강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