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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03 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방에서 일본군의 압박은 가중되고 탄약은 고갈 되어 갔다. 이에 정환직은 부하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유격대와 군수품을 강원도로 집결시키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강원도로 북상하던 중 청하 군 갈전葛田에서 체포되어 1907년 11월 16일 영천에서 피살되었다.202) 이때 청송출신으로는 중군장 이세기‧좌포장 임용상‧군문집사軍門執 事 김진영‧장영수위將營守衛 배연집裵淵輯‧진군지휘進軍指揮 홍우섭洪禹 燮 등이 진영에 편성되었고, 서종락 등은 청송지역을 담당하여 활동 하였다. ④ 산남의진(3차)과 청송지역 정환직 사후 최세윤이 1908년 2월 초5일 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최세윤은 을미의병 때 안동의진에 참여하였고,203) 또 산남의진 결성 초부터 정용기 ‧정환직 부자를 도와 청하‧흥해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추대 되었다. 최세윤은 대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북상계획을 중단하였다. 이미 13도의 병연합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의병활동이 분산적이고 독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군의 증강과 의병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산남의진은 경상도 하나 만이라도 확보하기 위한 지구전을 계획하고, 24개 지역 79명으로 구성된 지역활동 책임자를 선정하였다.204) 202) 山南倡義誌 下, 2-14쪽. 203)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집, 독립운동사편찬 위원회, 1970, 36쪽; 裵勇一, 「山南義陣考」,《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5집, 한 민족운동사연구회, 1991, 141쪽;《京鄕新聞》 1989년 10월 11일자. 204) 山南義陣遺史 , 257-259‧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