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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하자, 이에 반발하여 무장독립투쟁을 견지하던 김대지는 만주 길림으로 와 동향의 황상규 등과 논의하여 의열투쟁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 갔다. 5) 길림에는 1919년 3·1운동 이전부터 이미 박찬익, 정원택, 여준, 조소앙, 김좌진, 황상규 등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의군부가 결성되어 무장 독립론을 주장하며 조선독립군정사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적 무장투쟁을 위해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10년대 중반 중국에 들어와 있던 김원봉은 남경에서 봉천으로 가던 도중 3·1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봉천에서 김약수를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그리고 길림 에 도착하여 황상규 등 대한독립의군부 인사들과 만나 논의한 끝에 일제 에 대한 암살 파괴활동을 통한 폭력혁명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다. 동향의 선배이며 친척인 김대지, 황상규의 조력하에 김원봉은 뜻있는 동료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이종암(양건호), 이성 우, 신철휴, 서상락, 강세우, 김옥(김상윤), 한봉근, 한봉인 등과 ‘직접행동’ 의 필요를 견지하고 다시 길림으로 함께 와 숙의한 끝에 의열단을 결성 하게 되었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씨 집에서 김 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곽재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 상윤, 신철휴, 배동선(배중세), 서상락 등 13명이 모여 국내외에서 의열투 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의열단을 결성했다. 이때 의열단의 단장격인 의백에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이미 폭탄 사용 및 제거법을 교습 하는 등 활동방향을 일찍부터 확실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의열단의 조직 목적과 추진 방법은 공약 10조를 통해 규정하고 처단대상과 파괴대상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처단대상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 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탐, 반민족적 토호열신이며 파괴대상은 조선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일제의 중요기관이 5) 姜大敏, 「一峰 金大池의 抗日獨立運動」, ꡔ釜大史學ꡕ 19, 부산대학교사학회, 1995, 579~590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ꡔ독립운동사자료집 11: 의열투쟁사자료집ꡕ, 1976, 6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