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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이 들어와 있는 사실을 알리며 거사 실행에 대한 준비를 주문하고 상해 로 건너가 김원봉에게 국내의 상황을 보고했다. 43) 따라서 밀양에 들어와 있던 폭탄의 주요 타격 대상은 밀양은 물론이고 철도를 통해 이동이 용 이한 경성의 식민 탄압 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뒤이어 김원봉과 이성우는 다시 폭탄 13개를 제조하여 이번에는 폭탄 13개와 권총 2자루, 탄환 100여 발을 선편으로 안동현의 이병철에게 보내 고 다시 이병철은 이를 수수 20가마니에 포장하여 경의, 경부철도를 이용 하여 부산진역으로 보내 창원의 배중세에게 전달하여 진영역 근처에 숨 겨두었다. 그런 후 김원봉 외 2인을 제외하고 모든 단원들이 국내에 잠입 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시간을 기다렸다. 의열단원들은 폭탄이 반입되어 있던 밀양과 부산에 각각 보관 및 운반을 위한 의열단원과 실 행을 위한 의열단원을 각각 배치하고 나머지 단원들은 모두 경성에 잠입 하여 실행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4) 두 번째 폭탄을 진영역 근처에 숨겨둔 것은 아마도 철도를 이용하여 가깝게는 부산과 마산, 멀게는 경성 등의 타격 대상을 계획하고 숨겨두 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조사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수택 과 윤치형이 부산 구포에 은닉하며 이 폭탄을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 었던 것으로 보아 주요 타격 대상은 가깝게는 부산과 멀게는 철도를 통 한 경성의 식민 탄압 기구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밀양도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의열단의 타격 대상은 폭탄이 숨겨져 있는 밀양 과 부산의 식민탄압기구 또는 철도를 통해 식민탄압기구의 심장인 경성 지역을 타격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열투쟁은 1920년 7월 10일경 거사일로 예정하고 사전에 모의 하던 의열단원들이 부산경찰서와 경기도경찰부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면 서 불행히 좌절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 폭탄 은닉처도 드러났다. 이로 말 미암아 의열단원 등 관련자 20명이 일경에 피검되어 그중 15명이 기소되 43) 경성지방법원, 「곽재기 등 15인 판결문」(刑公 제254·255·256·257호), 1921. 44) 경성지방법원, 「곽재기 등 15인 판결문」(刑公 제254·255·256·257호), 1921.